정운찬이란 이름이 이토록 강력한 복합작용을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분명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며칠 사이 그에 관한 무수한 기사와 비평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숱하게 쏟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 관한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를 잘 몰랐고 여전히도 잘 모른다는 역설뿐인 것 같다.

그에 대한 설익은 관심과 엇갈린 입장들이 난무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그 역설이 성립하는 다른 방식이기도 할 테다. 역대 서울대 총장 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았다던, 국내 경제학의 계보에서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다는, 지난 대선에선 강력한 대항마로 거론되기도 했던, 하여간 학 같던 그가 그저 가장 높은 자리를 찾아 날아올랐다는 것 외엔.

▲ 정운찬ⓒ오마이뉴스 유성호
사실, 나 역시 정운찬을 잘 모른다. 경제학자로서 그의 견해가 얼마나 특출 난 것이었는지 그의 학문적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경제학도도 아닐뿐더러 경제학에 특별한 더듬이를 갖고 있지 않은 나로선 알 길이 없다. 그저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수준이다. 현실 참여에 대한 필요와 욕구를 평소부터 강하게 갖고 있었고, 학자가 책상물림만 해선 안 된다는 것이 지론이었다고 하는데 왜 하필 지금에서야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지도 어림짐작만 할 뿐, 정확히 가늠하긴 어렵다.

전 지구적으로 혹독하게 몰아쳤던 지난 1년여 간의 경제위기 국면에서 정운찬이 어떤 발언, 입장들을 표명했는가를 찾아봤는데 별 다른 게 없었다. MB와의 코드 불일치로 얘기되는 주요 정책에 대한 반대 발언들도 꼼꼼히 읽어봤는데 각이 예리하게 잡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는 지난 1년 여간 그는 대체로 무난한 행보를 보여 온 듯싶고, 누군가의 분석처럼 ‘케인지언’이라는 그의 관점이 아무리 대단한 것인들 정서적으로 MB정권의 근본과 충돌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를 개인적으로 좀 안다는 사람들이 입에 올리고 있는 자유주의의 문제도 그렇다.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라는 것이 흐리멍텅의 친환어가 아닐진대, 서울대 총장까지 지낸 그에게 자유주의자라는 칭호를 달아 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예컨대 그가 대마초 합법화 같은 것에 어떤 일관된 입장을 갖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1년 365일 정장에 넥타이로 스타일을 유지하고 다니는 자유주의자는 흔치않다.

따라서 중도라는 입장과 처신이 현실의 어디까지 걸칠 수 있는 것인지가 무척이나 애매한 환경에서 몇 가지 단순한 추상화 과정을 통해 그를 의미화 시키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도 않을 뿐더러 상황을 전망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을 평하며 지나친 낭만주의에 젖는 것 또한 지양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한 번이라도 정치가 이념과 입장에 따라 구분되는 성질의 것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그는 영웅도 아닐 뿐더러, 만에 하나 한 명의 영웅이더라도 중층적으로 꼬여있는 정국을 구할 수는 없다.

같은 맥락에서 경제학자로써 탁월했던 점을 근거로 그에게 기대를 거는 것 역시 적절한 바람은 아니다. 이미 MB의 경제와 자신의 경제가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하기도 했거니와, 그는 경제부총리에 내정된 것이 아니잖은가. 그가 수행해야 할 역할은 경제를 부분으로 하는, 국정운영 전반에 관한 것이다. 그가, 강만수-윤증현으로 대변되는 노회한 경제 관료 그룹들을 꺾고 경제 기조의 방향을 틀 것이란 기대는 애초에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역시나 구체성이고 각론이다. 그가 배반을 했다느니, 민주당은 이제 큰일 났다느니 하는 따위의 호들갑으로는 별로 건질게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아마도 '개혁과 통합'이라고 하는 그의 내각에 걸려있는 목표 그리고 대통령이 그에게 부여한 '민생과 일자리 챙기기'라고 하는 과제에 대한 그의 적합성 여부일 것이다. 결국, 정운찬을 통해 ‘개혁과 통합’이라고 하는 프레임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구현될 수 있을지의 문제이자, 산적한 현안에 대한 그의 대처 능력이다. 이제 그만, MB는 우리 편이 아닌데, 무조건 MB가 싫은데, 점잖아 보이던 양반이 왜 그리로 갔냐는 수준의 문제의식은 접자.

그가 잘해낼 수 있을까? 난 다소 회의적이다. MB와 청와대가 지금은 입발린 소리들을 하고 있지만, 구조적으로 한계는 너무나 명백하고, 그의 내용은 무엇 하나 제대로 검증된 것이 없다. 단적으로 그는 현재적 문제들에 관해선 별로 발언한 적이 없다. 총리 내정 간담회에서 4대강 사업과 세종시에 대한 그의 입장과 발언이 확인되어 논란이 확산 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현안의 전체는 아니다. 언론 장악에 대해서 그리고 용산참사에 대해서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MB 정부 이후 민주주의의 가치들이 훼손되고 있는 일련의 상황에 대해서 그가 입장을 갖고 있는지도 미확인 사항이다. 일각에서는 그가 큰 거래를 통해 자리를 잡았지 않겠냐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통령 중심주의의 완고함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태도이다. 어떤 거래를 했더라도 총리를 맡은 이상 그는 숙명적으로 대통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를 전국적 인사로 만들었던 서울대 총장 시절, 그는 참여정부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그는 3불제에 반대했고, 대학 입시의 자율화를 원했다. 국립대 법인화 정도가 아마 그와 참여정부가 유일하게 일치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말하자면 그는 교육의 산업화 내지는 경쟁 심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그가 이번에도 경쟁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자신과 MB가 다를 게 없다고 한 것을 보면 경쟁을 그의 소신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싶다.

당시 그의 그 소신을 조중동은 대통령과의 ‘맞짱’이라고 표현했었다. 그는 교육이란 ‘좋은 재료를 뽑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었고, 입시란 솎아내는 과정이라는 원색적 표현도 했었다. 그가 추종하는 경쟁이 어떤 사회문화적 효과를 낳을지 그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었다. 그가 논술을 외치는 순간 대치동 학원가의 간판은 모조리 논술로 바뀌었었다. 경제학자로서의 그의 소신이 현실과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변질되는 가에 대해 그는 철저하게 책상물림일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경제학계를 넘어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 과정은 고졸 대통령을 놀려먹던 보수세력과 조중동의 구미에 딱 들어맞는 논쟁을 그가 던졌었기 때문이었다. ‘원자재’ 타령을 늘어놓으며, ‘고교 평준화’를 계층 이동을 막는 제도로 규정했던 그의 인식은 자유주의로서의 면모라기보다는 최상위 ‘학벌권력’을 가진 자의 오만과 편견의 소산처럼 보였다.

확실히 정운찬은 경기고-서울대-프리스턴으로 이어지는 환상적 학벌권력을 가진 60대 엘리트와 홀로 야구장을 찾아 김밥을 까먹는 인상 좋은 두산 팬으로 분리되어 있다. 청와대의 정운찬과 민주당의 정운찬이 다르고, 개혁적 대학교수들이 보는 정운찬과 젊은 좌파들이 보는 정운찬 역시 다르다. 강호에 내던지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분리된 이미지들을 적절히 구사하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지금까지의 정운찬이 그랬다. 하지만, 이젠 선택을 해야 한다. 이미지를 가공해내는 정치와 미디어의 힘이 아무리 가공한 것인들 진실을 오래 기만할 순 없다. 그의 선택은, 진짜 그는 누구일까? 진심으로, 그가 부디 실패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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