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나? 그가 담기는 ‘그릇’으로서 MB 정부가? 그는 어떤 그릇에도 담길 수 있는 그런 학자였나? 아니면 담기는 그릇을 바꿔보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그런 학자였나?

개인적으로, 언론에 있을 때 2~3번 술자리에서 만나본 정 교수의 ‘아우라’(발터 베냐민이 말하는, 지각대상의 주위에 몰려드는 연상 작용을 통해 이뤄지는 대상의 개별성 또는 고유성에 대한 인식)는 이런 의문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이고, 자유주의자이다. 언론 표현대로라면 합리적 자유주의자, 또는 보수적 자유주의자이다. 독재나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애초 품었던 이런 의문은 정 교수가 MB 정부에 입각하는 것에 거부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왔다는 언론보도를 보며 더욱 깊어졌다. 정 교수의 총리 후보 수락이 어느 일방의 ‘감언이설’이나 ‘주관적 낭만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MB 정부와 정 교수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데 따른 것이라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에 대한 내 답은 ‘그래, 케인지언은 국가 성격을 따지 않는다’는 거였다.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한 정부가 민주적인지, 독재적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고, 정 교수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굳이 따지자면, 참여정부 후기에 열린우리당이 애초 내세웠고 현 정부가 이어받은(?) ‘실용’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 정운찬 국무총리 내정자ⓒ오마이뉴스 유성호
어디까지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결과일 뿐

이렇게 보면, 정 교수는 ‘어떤 그릇에도 담길 수 있는 그런 학자’인 셈이다. 경제 철학만 맞는다면 말이다. 그는 마지막 수업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경제학자로서 이런저런 비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에 (대통령과)만난 토대로 말하자면 그분과 나의 경제철학이 크게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본적으로 경쟁을 중시하고 촉진하되 경쟁에 뒤처진 사람을 따뜻하게 배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생각이 같다”고 말했다.

정 교수의 이 말에서 난 처음으로 알게 됐다. 이 나라 대통령이 정 교수와 같은 경제철학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를 말이다. “경제철학이 같다”는 정 교수의 말에서, 그가 이 나라 대통령의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사람들보다는, 이 나라 대통령이 정 교수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기에 대통령이 톡톡히 재미를 본 건 분명한 것 같다.

‘삽질’이 상징하는 토목 관련 사업을 보면, 이 나라 대통령은 분명히 ‘케인지언’인 측면이 있다. 전쟁과 군비 확장 등을 통해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것에 ‘군사적 케인스주의’(military keynesianiasm)라는 이름이 있고, 사회 문제아들을 몽땅 때려잡아 교도소에 처넣어 실업률을 축소하는 것을 빗대 ‘교정(矯正)적 케인스주의’(penal keynesianism)란 말까지 있는 것에 비하면 ‘삽질’은 케인스주의의 고전적인 전형이기까지 하다. 민주적인지 독재적인지를 떠나 ‘실용’의 기준에서 이 나라 대통령과 정 교수는 케인스주의자이다.

그런데 이 나라 대통령이 “경쟁에 뒤처진 사람을 따뜻하게 배려해야 한다”고 진실로 행각하는 걸까? 이벤트 차원의 몇몇 ‘쌩쇼’만 봐왔던 데다, 정책 차원에서도 연간 20만원 한도 유류지원금 등 생색내기 수준의 ‘잔여적’(residual) 수단들만 동원되면서도 갖은 홍보로 도배질 돼온 전형적인 ‘우익 포퓰리즘’이 지금까지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 교수에 대해 많은 이들이 ‘절제된 유감’을 표현하는 이유도, ‘쌩쇼’를 바꿔줬으면 하는 기대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 서민의 고통을 진정으로 어루만지는 정책의 전환을 바라는 것이다. “양극화 해소하고 어려운 사람이 많이 돕고 싶다”는 그의 말은 이런 기대를 부추기고도 남는다.

민주적, 독재적 구분 없는 '실용'으로의 합치

하지만 정 교수가 이런 ‘정치’를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는 ‘정치’가 아닌 ‘행정’이라고 할 것이다. 정치를 안 하겠다고 했는데 총리를 하게 된 계기를 묻는 학생들의 물음에 그는 “대통령을 잘 보좌하는 게 총리의 역할이고, 정치가 아니라 행정을 하는 것”이라는 다소 실망스러운 답변을 했다. 가치를 배분하는 결정을 내리는 게 행정과 정책의 본질이고, 그것이 정치를 통해 이뤄진다(정책을 뜻하는 policy와 정치를 뜻하는 politics는 polis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말이다)는 상식에 비춰보면, 걱정스럽기까지 한 답변 내용이다.

문제는 정 교수가 말하는 방식으로 행정을 이해한다고 해도, 총리가 하는 행정은 경제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 정책’ 또는 ‘사회 정치’, 그리고 그 핵심의 하나인 방송과 통신을 아우르는 커뮤니케이션 정책 또는 정치와 맞닥뜨려야 한다. 한겨레의 지적처럼 정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 침묵해 왔다. 그가 갖고 있는 실용과 케인스주의가 결합한 나름의 경제철학은 이 지점에서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중도라는 애매한 기준도 소용이 없다. 세상에 공영방송을 국가 소유물로 여기고,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리며, 시민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불법적 ‘법치’를 자행하는 것을 용인하는 ‘중도’는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외면하는 한, 정 교수는 반쪽 총리, 따라서 총리가 아니라는 불명예를 안아야 할 가능성이 높다.

국가나 정부의 성격이 민주적인지 독재적인지를 따지지 않으려면 정 교수는 그나마 경제부총리를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어쨌든 그는 스스로 시험에 들었다.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시험이다. 정 교수, 당신은 ‘민주주의자’인가? 판단 기준은 그의 말이 아닌 행동이다. 자유분방한 성향의 ‘자유주의자’ 정운찬이 단지 경제적 자유주의자였을 뿐인지, 아니면 정치적 자유주의자이기도 했던 것인지가 곧 드러날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 꼭 필요한 정치인의 하나는 ‘민주적 케인스주의자’라는 게 개인적인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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