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팔리는 내 이야기다. KBS 시청자위원회 공모에 응했다가 또 떨어진 공공미디어연구소 이사장, 문화연대미디어문화센터소장, 한국언론정보학회이사, <문화/과학> 편집인, 영상원 교수의 남사스러운 일이다.

노무현 정권, 정연주 사장 때는 왜 그랬는지 예선에서 떨어지고, 이번에는 본선까지 올라갔다는 데 또 떨어졌다. 새로 서류 제출하라고 해 혹시 이번에는 될까 싶었는데, 한 마디로 탈락이다. 허참 약 올리는 것인지 욕보이자는 것인지. 섭섭하기에 앞서 짜증이 확 난다. 남들한테 할 이야기 아니라 할지 모르지만, KBS 시청자위원 지원이 공공연한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를 이렇게 알리는 것도 창피하지만 필요한 것 같다.

▲ 서울 여의도 KBS 본사 사옥 ⓒ미디어스
며칠 전 ‘미디어스’의 개인적으로 ‘택’이라 부르는 친한 기자가 전화를 해왔다. ‘선생님 혹시 KBS 시청자위원회에 지원하신 것 결과 나왔나요?’ 없었다고 답했다.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미디어워치’의 편집장 모씨 이미 KBS 시청자위원으로 위촉되었다는 것이다. 설마 싶어 인터넷을 뒤져보니 진짜로 ‘빅뉴스’는 그 사람이 위촉되었다는 기사를 떡하니 싣고 있는 것이다. 8월 31일 1시 30분에 기사로 작성된 것을 보니까, 8월 말에는 이미 KBS가 새 시청자위원들을 확정해 개별적으로 통보한 모양이었다. 쩝쩝.

나야 떨어졌지만, 그것도 보기 좋게 두 번 연달아 떨어졌지만, 그 대단한 KBS시청자위원회에는 대체 어떤 사람들이 뽑혔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이건 또 무슨 일? 명단이 전혀 올라와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새로 뽑힌 사람들에게 일일이 개별 통보하고, 공식적으로는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참 이상하다. KBS가 개인 회사도 아니고 자칭 ‘국가기간방송’이고 그런 공영방송사가 법에 따라 시청자위원을 뽑아놓고는 무슨 일인지 그 결과를 공표하지 않는 것이다. 뭐가 그리 대단해서 혹은 무엇이 그리 구려서 공개하지 않는 것인가?

이렇게 화도 나고 짜증도 나서 KBS에 욕이라도 퍼부어 주려고 전화기를 드는 찰라, 어라 KBS로부터 메일이 하나 도착해 있다. ‘KBS 제20기 시청자 위원 선정 결과’라는 제목의 짧은 통지문이었다. 한 마디로, 지원해줘 고맙지만 유감스럽게 떨어뜨렸으니 섭섭해 하지 말고 시청자의 일원으로 고견과 질책을 날려달라는 뻔한 글이었다. 시청자센터장이 첨부한 ’감사의 글‘을 한 번 더 읽어본다. 42명이 지원했던 모양이다. 그 중 “부문별, 성별, 연령별 균형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시청자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숙고를 거듭한 결과 시청자위원 13인을 선정했다”고 했다.

계층 계급별, 지역별, 이념별 균형도 중요할 텐데, 대체 부문과 성, 연령이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잣대에 따라 조화롭게 뽑았다는 13인의 영광스러운 얼굴이 너무나 궁금하다. 언론개혁시민연대의 김정대 활동가도 나처럼 똑같이 ‘짤렸다’니, 대체 그 무리 속에는 진보의 무늬가 존재하기나 한 것일까? 오마이 갓! 그러고 보니 나와 김정대 활동가는 대략 3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 속에서 떨어졌구나! 대체 얼마나 탁월하신 분들이기에 그 부문과 성, 연령별 조화 균형의 엄격한 심사절차를 통과할 수 있었을까? 축하하고 또 축하드리는 바이니, 부디 맹렬한 활동으로 뽑아준 공사 측에 서비스하기를.

그들을 뽑기 위해 우리를 배제한 KBS 사측에도 한 마디 하는 바이니 말씀하신대로 “고견과 질책을 겸허히 수용”해 주길 바란다. 이러면 안 된다는 충고다. 이러면 큰일 난다는 경고다. 떨어져 기분 나쁜 게 아니라, 우리를 갖고 온간 계산법을 동원하고 이해타산을 따졌을 것 같아 화난다. 정치적 입장을 크게 고려한 게 명백한데도, 내가 ‘부문과 성, 연령’의 조화 균형의 원칙에서 밀린 것처럼 되어 기분 억수로 잡친 것이다. 조화를 말하려면 이념의 조화를 우선 따져야 했고, 균형을 말하라면 정치의 균형을 강조했어야 한다. KBS를 둘러싼 논쟁은 바로 이 두 가지 결정적 기준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 줄 알겠는가? 무슨 뜻인지도 모를 ‘부문’을 고려하기 전에, 너무나 당연한 젠더와 세대를 고려하면서 동시에, KBS의 현재와 미래에 관해 우리 사회가 결정적으로 나누어져 있는 정치․이념적 요소를 시청자위원 위촉과 시청자위원회 구성의 조건으로 삼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과 연령으로 아무리 절묘하게 뒤섞여있더라도, 그 면면이 이념․정치적 일색이라면 어찌 이를 균형 잡힌 결과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보수와 뉴라이트, 그리고 다루기에 크게 어렵지 않을 소수 자유주의자들로 구성된다면, 이를 어찌 조화로운 배치라고 평가해주겠나?

큰 걱정이다. 이런 식으로 비밀리에 구성되는,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아직까지 명단조차 공개하지 않는 새 KBS 시청자위원회의 앞날이 뻔하게 내다보여서 그렇다. 이런 시청자위원회가 수신료 인상 아이디어에 어떻게 기능적으로 협조할 지, 지극히 우려스럽다. 시청자의 권익을 최우선시해야 할 시청자위원회가 사측과 공모하거나 외부 권력의 허수아비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불안하다. 잘 되고 잘 할테니 물먹은 당신은 제발 투덜대지 말고 빠지라고 하고 싶을 게다. 그러나 어쩌시겠나? 나는 또 떨어져 엄청나게 짜증나 있고, 나는 이렇게 입을 가졌고, 또 다른 행동을 취할지도 모르는데.

그 또 다른 행동이 무엇일지 궁금하신가? 시청자로서, 학자로서, 그리고 진보적 미디어운동진영의 활동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권력기구화하고 탈공영화하고 반사회적인 채널로 전락하고 있으면서도 태연스레 공영방송법을 대가로 수신료 인상을 꿈꾸고 있는 당신들에 맞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견과 질책’? 천만의 말씀. 지금은 절대 그런 한가한 때가 아니다. 그래서 시청자위원으로 지원한 건데, 또 이렇게 ‘따’되고 수모를 당했다. 제도 안에서의 활동은 허락하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바깥에서의 행동에 열중하는 수밖에. KBS의 비상식적 행보에 ‘그건 아냐, 멍청아!’라고 단호히 대적하는 일.

지금처럼 ‘비평의 무기’를 예리하게 연마하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까? 벼락같은 이성의 도끼질, 결을 거스른 감수성의 대패질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래디컬’한 저널리스트로의 변신. 자본권력과 국가권력, 매체권력, 지식권력이 나의 상대다. 가끔 참패당하고 때로는 붙잡고 버티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왼손펀치 한방을 가진 선수로 남고 싶다. 인민은 착하고 또 무섭다. 이들과 함께하는 비평 말고 그 어떤 것이 후기근대, 후기자본의 불모지대를 넘어갈 수 있겠나? 목청 낮춘 채 예의주시하는 보통사람들의 삶, 이들의 언어에 스며들어 비평의 유격전을 벌인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