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출신의 저명한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마셜 맥루한(Herbert Marshal Mcluhan)은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경구를 통해, 의사소통 형식 자체가 전달되는 내용을 규정하고 제한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맥루한 이후 최고의 이론가로 꼽히는 이 책의 저자 닐 포스트먼(Neil Postman)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미디어는 메타포”라고 규정한다.

▲ 죽도록 즐기기 (닐 포스트먼, 2009)
메시지는 대상에 대한 구체성과 명확성을 띄어야 하는데, 이와 달리 미디어는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특정하게 정의하도록 강력한 암시를 투사하는 메타포와 같다는 것이다. 가령, ‘시계’라는 사물은 어떤 제품을 생산할 때 인간의 활동을 시간과 분리시키는 효과를 내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일련의 독립적인 세계가 있다는 믿음을 조장한다. 이렇게 조장된 믿음은 인간의 사고방식에 파고들어 고정관념을 형성하고, 더 나아가서는 문화의 내용까지 변질시킨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변질의 핵심은 신문과 잡지로 대표되는 설명의 시대(the Age of Exposition)가 텔레비전이 지배적 미디어가 된 쇼 비즈니스의 시대(the Age of Show Business)로 이행하는 미디어-메타포의 대전환 과정에서 공공담론이 초라할 정도로 무력화됐다는 점이다.

텔레비전을 향한 저자의 비판은 시종일관 대단히 신랄하다. 인쇄술이 문화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텔레비전이 그 중심부를 장악하면서 공공담론의 진지함, 명료함, 무엇보다도 그 가치를 위험할 정도로 저하시켰다. 현대의 정치, 종교, 뉴스, 스포츠, 교육과 상거래는 별다른 저항이나 소리 소문 없이 쇼 비즈니스(show business)와 유사한 부속물로 변질됐다.

텔레비전이 창조한 인식론은 활자 매체 기반의 인식론보다 저급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고도 가장 불합리하다. 텔레비전은 쓰레기 같은 오락물을 방영할 때 가장 쓸모 있게 기능한다. 텔레비전을 통한 지각방식은 인쇄를 통한 지각방식에 철저하게 적대적이다. 텔레비전을 통한 의사소통은 모순과 하찮음을 조장한다. ‘진지한 텔레비전’이라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텔레비전은 오직 한 가지 소리(오락의 소리)만을 고집한다. 하찮기 짝이 없음에도 주제넘게 과대 포장된 텔레비전은 스스로 중요한 문화적 의사소통의 전달자로 자처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이 우려할만한 현상에 대해 숱한 경고가 있었지만, 쇼 비즈니스가 제공하는 재미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정작 삶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더는 신경을 쓰지 않게 되는 ‘정보 과식증’에 걸리고 말았다.

저자의 이런 날선 비판은 방송의 상업주의 전통이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미국 사회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실제로 우려할 만한 변화가 시작됐다.

어느 순간부터 한없이 가벼운 눈요깃거리들이 정작 뉴스에서 다뤄져야 할 진지하고 무거운 의제들을 하나 둘씩 대체하기 시작했다. 비판은 사라지고 홍보성 기사와 연성뉴스가 넘쳐난다. 제법 권위를 자랑했던 심야 뉴스프로그램의 초대석은 정책 담당자가 아닌 연예인들의 차지가 돼버렸다. 넘쳐나는 오락거리의 홍수 속에서 텔레비전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게 된 사람들에게 이제는 죽도록 즐길 일만 남은 셈이다.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말했다. 우리가 좋아서 집착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 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아침에 TV뉴스나 라디오 또는 조간신문을 통해 접한 정보로 인해 하루의 계획을 바꾸거나, 아니면 하지 않았을 일을 저질렀다거나, 무엇인가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얻은 적이 얼마나 자주 있는가?

그런데도 이 땅의 정부는 지금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기업, 신문과 굳게 손을 잡고 방송의 상업화야 말로 우리 앞에 펼쳐진 단 하나의 미래이며 미디어 산업을 선진화하는 길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정확하게 24년 전, 그러니까 지금처럼 휴대전화와 인터넷, MP3, PMP 따위가 보편화되기 훨씬 전에 씌어진 이 음울한 비관론은 뛰어난 분석과 통찰로 사반세기 뒤에 올 상황을 예견했다.

“대중이 하찮은 일에 정신이 팔릴 때, 끊임없는 오락활동을 문화적 삶으로 착각할 때, 진지한 공적 대화가 허튼소리로 전락할 때, 한마디로 국민이 관객이 되고 모든 공적 활동이 가벼운 희가극과 같이 변할 때 국가는 위기를 맞는다. 이때 문화의 사멸은 필연적이다.”

▲ 닐 포스트먼(Neil Postman)
미국의 풍자소설가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는 죽기 전에 쓴 마지막 책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 매체인 신문과 TV는 오늘날 국민 전체를 대표하기에 너무나 부실하고, 너무나 무책임하고, 너무나 비겁하다고.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매체는 책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런 그가 사랑했던 미국은 아직도 공공 도서관 접수창구에 존재한다는 말은 실로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도서관 사서들을 진심으로 전경한다. 내가 존경하는 것은 그들의 물리적 힘이나 연줄 또는 막대한 부가 아니라, 이른바 위험한 책들을 도서관 서가에서 제거하려는 반민주적 불량배들에게 끈질기게 저항하고, 그런 책들을 열람하는 사람들을 사상경찰에게 신고하는 대신, 열람 기록을 몰래 파기하는 양심과 용기다.”

생각을 말과 글로 옮길 자유를 군홧발로 짓밟고 진압봉으로 깨부수던 과거가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그 망령을 무덤에서 불러낸 건 우스꽝스러울 뿐 아니라 진부하기 짝이 없는 불온서적 파동이었다. 한없는 비웃음을 자아낸 이 엉터리 같은 소동은 출판업자와 판매업자들의 배를 불려주었을 뿐이다. 애초에 돈을 벌어볼 요량이었으면 절대 손대지 말았어야 할 지적 유산들을 우리에게 선사해준 출판업자들도 이로써 자신들의 노고에 대한 작은 보답을 받았으리라.

텔레비전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우리 신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텔레비전 스스로도 절대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텔레비전이라는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오로지 책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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