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도달할 목표가 아니다. 선거를 핵심으로 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의 형식과 절차를 민주주의로 대체하면 곤란하다.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다양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그리고 그 현실관계들의 끊임없는 재구성으로 민주주의를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다양한 영역에서 재생산되는 사회적 관계 속에 내재된 부당한 권력관계를 해소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말한다면 특정한 형식의 쟁취의 측면보다 권력관계의 부당성을 줄여가는 운동으로, 궁극적으로는 해소하는 투쟁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 지난 22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방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재적 294인에 재석 145인으로 과반수인 147명을 넘기지 못한 것으로 전광판에 표시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22일 대리투표, 재투표 해프닝은 오늘날 한국사회가 도달한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온전히 드러내 보여준다. 한나라당은 지금껏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고,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전자투표 로그기록을 바탕으로 최소 34건 이상의 대리투표 의혹 제기와 일사부재의 원칙을 들어 미디어법의 ‘원천무효’를 주장하고 있다.

입법부를 구성하는 여야 국회의원들 간의 쟁투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입법 활동을 하는 과정은 사회구성원의 다양한 이해를 수렴, 반영하는 것으로, 사회적 권력관계를 온전하게 드러낸다. 이 과정을 효과적이고 정당한 방식으로 규율하는 것이 이른바 국회법이고, 국회법은 입법에 관한 과정과 절차를 규정하는 헌법에 버금하는 또는 다음가는 권위를 지닌다. 이번 대리투표, 재투표 소란은 입법 주체들이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훼손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가령 전자투표는 기명투표의 하위 투표방식의 하나로 도입됐다. 전자투표는 기명투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기술 진보를 반영한 투표 방식이지만 대리투표에는 관대하지 않다. 이에 대해 서복경 전 국회 입법조사연구관은 전자투표를 기명 무기명 외에 제3의 투표로 보고 전자투표를 규정하는 의사 정족수 규정이 없으므로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은 위험하다고 짚었다. 한국의 헌법과 국회법은 대리투표를 인정하지 않는 원리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단 한 건의 대리투표가 발생했더라도 표결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는 해석도 내놨다.

야당이 헌재에 김형오 국회의장을 상대로 권한쟁의심판청구 및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에 따라 헌재는 이번 재투표가 일사부재의 원칙에 어긋나는지, 대리투표가 행해졌다면 야당의원들의 표결권을 침해했는지 등을 판단하게 된다. 헌재가 결정을 내리게 되면 대리투표와 재투표의 위법성에 대한 첫 판례를 남기게 된다. 입법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입법 절차의 문제를 사법부에 묻는 것 자체에서 입법부의 권위가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은 불가피해보인다.

방송통신위원장인 최시중 씨는 “미디어법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이 헌법재판소에서 받아들여지게 될 경우에는 방향을 바꿔야 하겠지만, 우선은 그대로 시행된다는 걸 가정하고 행정적인 준비를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독립을 보장받지 못한 채 행정부처로 전락한 방통위가 사법적 권위를 행사하는 황당한 장면도 목격된다.

이에 따라 삼권분립의 지위와 관계를 둘러싼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문제 해결의 특정한 지점에 도달할 것이고, 이는 부르주아민주주의의 형식적 절차적 측면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논란도 아니거니와 본질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사회적 관계 속에 내재된 부당한 권력관계를 해소하는 과정에 위치지어질 때 진정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번 임시국회는 우리 사회에 내재된 부당한 권력관계를 드러내긴 했으되, 민주주의의 본질에의 접근 가능성은 철저하게 배제했다. 국회는 임시국회 동안 파병동의안과 미디어법 3개, 그리고 금융지주회사법을 처리했다. 비정규직법은 건드리지 않았다. 파병동의안을 여야 합의로 처리한 것과 미디어법의 대리투표, 재투표 논란, 그리고 비정규직법을 처리하지 못한 점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파병동의안은 평화를 원하는 시민사회의 요구와 국익을 추구하는 부르주아정치권력 간에 부당한 권력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여야라는 부르주아정치권력 간의 일방적 합의에 따라 본질적 요소가 해소되지 않은 채 일단락 되었다. 비정규직법은 고용과 생존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와 자본의 노동유연화를 수용한 부르주아정치권력 간의 부당한 권력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미디어법을 둘러싼 부르주아정치권력 간 힘겨루기 과정에서 본질적 요소에 접근하지 못했다. 미디어법 처리 과정에 빚어진 대리투표, 재투표 소동은 형식과 절차를 둘러싸고 빚어졌지만, 이 역시 조중동과 자본 대 미디어공공성을 주장하는 미디어 당사자 간의 부당한 권력관계의 반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으로, 지금 한국사회의 부당한 권력관계의 정점을 이루는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사태에 대해 임시국회는 손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할까. 이명박 정권 심판이나 퇴진 따위는 정권의 정통성을 뛰어넘는 대안과 함게 제기되지 않는 한 정치적 언사에 불과하며 호소력과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심판을 잘 하기 위해서는 선거를 잘 준비하면 되고 퇴진을 잘 시키려면 항쟁을 준비하면 되겠지만, 실현가능한 경로를 제시하지 않는 한 시민사회는 동의하지 않는다. 범국민대회나 전국순회투쟁 따위의 잦은 기획과 동원도 동원 대비 성과의 측면에서 현재로서는 시민사회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형편이다.

이같은 시기에는 지배와 피지배의 부당한 권력관계에서 피지배를 구성하는 당사자 간 대안을 위한 연대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미디어법 문제에 있어서는 헌재가 시민사회의 정서에 부합하는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힘을 싣는 활동이 필요하며, 부르주아민주주의의 형식적 관계를 뛰어넘으며 월권을 서슴지 않는 방통위의 행보에 절대 주의를 유도하는 게 필요하다. 공영방송의 편성, 제작 주체들은 어렵더라도 부당한 권력관계의 현실을 온전히 드러내는 활동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공영방송 외부의 컨텐츠 생산 주체와의 다양한 연대의 계기를 만드는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

피지배관계를 구성하는 주체와 주체간 관계에 주목하고 그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효과적 방안을 강구하는 것, 뻔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게 무더위와 무더위보다 더 짜증나는 현실을 이겨내는 유일한 통로다. 한국사회에서 부당한 권력관계를 무너뜨리는 민주주의 투쟁은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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