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명종조를 전후해 경기도 양주 인근에 있는 ‘청석골’에는 백정의 아들인 임꺽정을 비롯한 백수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각기 장점이 있는 8두령을 중심으로 뭉쳤고, 조정으로 가는 공물을 털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적이었다.

국민의 정부가 가고, 참여정부가 간 후 서인(鼠人)의 정치가 시작된 2009년을 전후로 서울 남산골 서남 비탈에는 ‘수유+너머’라는 백수 조직이 있었다. 독일병정을 닮은 여장부 고미숙 두령을 중심으로 내로라하는 백수들이 모였다. 그들은 먼저 박지원이나 들뢰즈, 자크 아탈리 같은 노마드들을 사숙하더니 2008년부터는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사숙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009년 7월 고미숙 두령은 ‘임꺽정’의 핵심 포인트를 추출해서 행동 강령서를 내놓았다. 대관절 ‘임꺽정’이 누구던가. 백정의 몸으로 반란을 일으킨 도적들의 상징적인 인물이고, 그의 소설을 쓴 벽초 홍명희도 북한에서 ‘부주석’을 지낸 인물이다. 작금의 서인 정치 시대는 이제 누구든지 잡아들일 준비를 마친 상태다. 아니 이미 집을 잃고 분노한 서민들을 불에 태워 죽였고, 지금도 아우성치는 민초의 목소리에는 귀를 닫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심기 위한 여론 조작 작업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고미숙이 쓴 ‘임꺽정’은 대단히 불온한 서적이다. 무식한 사람이 읽는다면 ‘혁명에 대한 찬양 고무죄’의 적용대상이자, 불온서적이 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는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이다. 또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이기도 하다. 여기서 마이너리그는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젊은 청년들을 비롯해 이제 무직이 필수가 되어버린 세대들을 말한다.

저자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마이너리거들은 바로 문화그룹인 ‘수유 너머’에 있는 이들이다. 나도 직접 그 곳에 가서 감상했지만, 옛 학교를 개조해서 만든 ‘수유 너머’는 정말로 현대판 ‘청석골’이라 할 수 있다. ‘갖바치’ 등 몇을 제외하고 ‘임꺽정’의 주인공들은 힘깨나 쓰는 이들이 중심이라면, ‘수유 너머’는 대부분 머리깨나 쓰는 이들이다. 이들은 이 곳에서 같이 먹고, 이야기하면서 다양한 문화적 아웃풋을 생산해 낸다.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고미숙선생인 만큼 고미숙의 정신적 향배는 상당히 중요한 느낌이다.

그런데 수유+너머가 2008년 ‘임꺽정’ 읽기에 상당히 공을 들였던 것 같다. 그리고 고미숙이 다시 그 에토스를 뽑은 책을 낸 것이다. 이 책은 ‘임꺽정’을 차용해 고미숙을 비롯한 ‘수유+너머’가 가진 문화적 코드를 그대로 옮겨놓았다. 사실 그들의 사고는 쉽사리 동화되기에 쉽지 않은데, 특징이 있다면 ‘임꺽정’은 그들의 구미에 꼭 맞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 안에 것을 구워먹고, 삶아먹고, 데쳐먹고, 쩌먹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뽑아낸 요소들도 당연히 공감 가는 것들이다. 책은 우선 ‘경제’, ‘공부’, ‘우정’, ‘사랑과 성’, ‘여성’, ‘사상’, ‘조직’ 등의 맥락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저자는 ‘임꺽정’이라는 무궁 장대한 텍스트에서 이런 콘텍스트(맥락)를 찾아내어 설명한다. 이 이야기를 쉽게 풀자면 “백수에 가까운 경제 능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생각을 나눌 친구들이다. 아파트 전세를 만들려는 옹졸한 생각이 아니라 ‘임꺽정’의 호걸들처럼 느낌 있는 사랑과 섹스를 해라. 이런 사회에는 여자가 결코 약하지 않다. 너희들만의 사상을 만들고, 조직을 만들어서 시대에 저항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임꺽정’을 읽었든 읽지 않았든 볼만한 책이다. 실제로 ‘임꺽정’의 주요한 내용과 인물들에 대한 설명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면 ‘임꺽정’을 다시 읽고 싶어지게 만들 뿐만 아니라 놓치기 쉬운 메시지들도 쉽게 느낄 수 있게 된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호모 쿵푸스’(공부의 인간)를 재미있게 읽었기에 ‘공부하려면 가출하거나 출가하거나’(87페이지)도 재미있게 읽혔다. 여기엔 집중하는 공부법은 물론이고 스승 찾는 법 등도 풀어놓았다. 길 위에 로맨스는 물론이고 조선시대판 스와핑까지 풀어낸 ‘사랑과 성’도 흥미롭다.

저자가 ‘임꺽정’의 가장 큰 매력으로 꼽는 것은 작가(홍명희)가 절대 이분법적 사고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층과 하층, 군자와 소인배, 선인과 악당들을 고루 다루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분법적 사고에 빠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전한다. 사실 내 스스로도 이 세상을 보면서 옹졸한 인간 군상을 보면 미움을 넘어선 증오를 느낀다. 하지만 홍명희가 그러하고 고미숙이 그러하듯 너무 한 쪽에 매몰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요즘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말하듯 ‘두려우면 도망치거나 분노하는 것’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시대 사람들이 절대 도망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것이 ‘조직’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 점은 노대통령의 비문 ‘민주주의 보루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물론 내가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임꺽정’을 해석했는지 모른다. 어떻든 이 책은 이런 중요한 키워드들을 잘 갖추고 있고, 그런 점에서 ‘미네르바’ 만큼이나 위험한 책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가치를 읽어내고, 반박논리를 낼 만큼 영특한 정권은 아니기에 안심이 된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길항적 삶을 실천하고 싶어 <미디어오늘>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97년 DJ가 당선되고나자 자유로워지고 싶어 여행잡지로 전직했다. 그런데 얼마가지 못해서 이 잡지가 망해서, 다른 잡다한 신문일들을 하다가 99년 9월 결혼과 더불어 중국으로 건너갔다. 학업과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중국에 적응했다. 2002년부터 '알짜배기 세계여행 중국'을 시작으로 10여권의 중국 관련서를 썼지만 언제나 내 책을 만들기 위해 잘린 나무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조만간에 좀 미안함이 덜할 책을 한권 낼 계획이다. 2004년부터는 중국 전문 여행 콘텐츠 회사인 '대국엔터테인먼트'를 창업해서 운영중이다. 올부터는 한신대에서 외래교수로 가르치는 일도 겸하고 있다. 한중 교류에 줏대를 세워주는 '한중 문화 하이웨이'라는 막연한 구상을 현실화 시키는데 정신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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