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투표, 재투표 논란 속에 한나라당이 미디어악법 직권상정을 감행했다. 소수 권력이 원했던 것을, 대중 다수의 반대 의사에도 불구하고 관철시킨 것이다. 아직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남았다. 그런데도 조·중·동과 재벌은 벌써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다. 더 많이 못 얻어 불만이다. 일부에서는 법개정 필요성을 들먹인다. 더 내줘야 한단다. 한나라당측 작업에 깊숙이 참여한 어떤 교수는 이런 분위기를 “규제완화 차원에서 진입장벽을 풀었다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는 말로 정리한다. 그 외에 또 얼마나 많은 전문가, 학자들이 권력을 위해 나섰던가. 그들이 내놓은 온갖 논리, 주장들을 꼼꼼히 정리해 놓아야 한다.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올 이번 사태의 책임을 분명히 물어야 한다. 한국 미디어와 정치 양식은 이들의 역할에 힘입어 2009년 7월 22일부로 전혀 다른 모습을 띄게 될 것이다.

▲ 한나라당이 미디어법을 직권상정해 표결처리하는 모습 ⓒ안현우
너무나 많은, 복잡하고 위험스러우며, 장기 지속적인 현상들이 예견된다. 그 중에서도 누구나 관측할 수 있는 명명백백한 결과는 미디어 집중, 미디어 독과점 체제의 등장이다. 미디어 재벌, 정확히 말해 미디어 복합기업의 탄생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정권이 공공연히 발표해 온 미래 청사진이다.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은 여러 차례 ‘미디어 선도기업’을 육성하고 ‘글로벌 미디어 기업’을 키워내겠다고 공언했다. 그러기 위해 미디어 악법처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또 그래서 미디어 악법처리를 환영한다고 했다. 그가 속한 진영에게 ‘글로벌 미디어 기업’은 자동적 선이다. 왜? 도대체 작금의 신자유주의 자본국가는 왜 “글로벌 미디어 기업을 꼭 키우겠다”고 이토록 집착하는가? 무엇을 위해 대리투표, 재투표의 무리한 추진을 통해서라도 민주/정치의 합리적 진행과정을 망가뜨려야 하는가?

요컨대 미디어 복합기업을 탄생시키고, 미디어 독과점 체제를 완성시키는 게 국가권력과 자본권력, 그리고 조·중·동권력의 삼각동맹에 무슨 의미를 갖는가? 미디어 집중·독점에 대한 현 정권의 집착을 우리는 한국사회 내 개혁·진보적 정치 가능성에 대한 치안 스테이트의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읽어내야 한다. 체제 안녕을 위해서는 대중교통의 공간에 반해 권력선전의 채널을 확대하고, 시민사회에 대항해 독점시장을 강화하는 게 필수적이다. 조중동과 재벌에 더 많은 이득, 새로운 시장을 보장함으로써 정권 장기집권 이득까지 확보하는 보수체제의 상호부조적 조처다. 정치를 통제하고 스펙터클을 일반화하며,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기득권을 재생산코자 하는 권력의 안보전략, 체제의 보안시스템으로 파악해야 한다. 선전과 상품미학으로 언론을 타파하고 정치공론을 대체하라.

20세기 초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선전을 독재가 아닌 서구 민주주의의 중대 요소로 파악한 긍정했다. 21세기 이 땅의 ‘반민주적 민주주의’는 이 ‘보이지 않는 정부’를 더욱 필요로 한다. 대중을 조종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과, ‘국민’을 소통=설득=홍보 대상으로 바라보는 데 본질적 차이는 없다. 이런 점에서 방통위 최 위원장이 ‘글로벌 미디어 기업’의 모범으로 뉴스 코퍼레이션을 꼽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루퍼트 머독이 구축한 세계 최대의 초국적 미디어 복합기업. 보수 경제 일간지 월 스트리트 저널 외에, 1986년 미국 제4의 지상파 네트워크로 출발한 폭스가 바로 이 미디어 재벌에 속한다. 폭스는 이제 CBS와 시청률 1∼2위를 다투는 인기 방송사다. CCN의 설립자 테드 터너가 부시 행정부의 ‘선전 주둥이’라고 혹평한 바 있는 폭스뉴스도 머독 제국의 인기 채널이다.

▲ 로버트 그린왈드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안티폭스>(원제 Outfoxed) 포스터. 루퍼트 머독의 폭스뉴스가 권력에 대한 감시기능을 포기하고 공화당의 이익에 철저히 봉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실태를 다뤘다
그런데 최근 폭스가 보여준 행태는 우리 방송의 미래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한국 의회 정치사에서 오랫동안 희비극으로 기록될 신문법 대리투표, 방송법 재투표가 벌어지던 날 저녁 여덟시(동부시간) 미국에서는 대통령 오바마가 건강보험 개혁에 관해 중대 텔레비전 연설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아홉시로 계획했던 것인데, 주시청시간대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NBC, ABC 등 방송사들 때문에 한 시간 댕긴 것이었다. 그런데 폭스는 오바마의 연설을 아예 방영조차 하지 않았다. “오바마 기자회견은 케이블 채널에서 다뤄도 된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가 제목을 단 것처럼, ‘오바마의 굴욕’인가? 과연 폭스는 편성의 독립성, 제작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백악관의 연설중계 요청을 과감하게 기각한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일차적으로는 <당신을 춤을 출 수 있다고 생각하시죠>라는 쇼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포기할 수 없었고, 그것이 보장하는 수백만 달러의 광고 수입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업적 이익의 계산이 사회 공통적 이익 즉 공익의 가치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 것이다. 노암 촘스키가 말한, 미디어·자본 권력은 ‘인민보다 수익(profits over people)’을 훨씬 우선시한다는 테제는 이번에도 명쾌하게 입증된다.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폭스의 선택에는 훨씬 음흉하고 위험스러운 구석이 있다. 1조 달러의 예산과 소득 100만 달러 이상 고소득 가구의 증세를 통해 ‘미국민들을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오바마 정책에 대한 기득권의 거부의사다. 변화에 대한 자본의 조직적 반발, 기득권의 구조적 불만을 미디어 복합기업이 대변한 것일 수 있다.

사실 경제·사회적 민주화 가능성에 대한 머독의 적대감은 이미 오래 전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2008년 대선 유세 중 오바마가 거대 미디어 집중 문제를 비판하고 언론 다양화 정책의 필요성을 개진한 이유도 이런 문맥에서 비롯된다. 정권 출범 이후 보도전문채널인 폭스뉴스는 오바마 정권의 대북 대화적 움직임 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클린튼은 지금 당장도 이 뉴스채널과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진정으로 그들과 얘기할 의도가 없다”고 약속하기 바쁘다. 단 한 개 글로벌미디어 기업에 속한 월 스트리트 저널과 폭스, 폭스뉴스의 통제력이 이처럼 막강하다. 최 위원장과 한나라당, 정권, 조중동, 재벌, 보수언론학자들이 원하는 게 바로 이것 아니고 무엇인가? 이 땅의 자본권력과 수구진영도 바로 이런 개혁적, 민주적, 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포획의 망, 억압의 선을 욕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으로써 이 땅에도 천년왕국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영속될 제국을 만들고자 하지 않은가? 21세기 제국주의의 중심국가인 미국 내부에는 데이빗 린치가 영화로 그린 ‘인 랜드 엠파이어’가 실제로 존재한다. 폭스는 제국주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그 촉수를 전지구적으로 뻗치고 있는 미디어 제국의 얼굴이다. ‘여우 제국’은 초현실적이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심리적 스릴러이기에는 너무나 물리적인 공포물로 존재한다. 그 권세는 이제 특정 정권의 힘조차 훨씬 뛰어넘어서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정치가 쉽게 허락될 수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거대 미디어 제국이 1996년 미국에서 방송통신 규제완화와 함께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교활하기보다는 무자비한 여우 제국이 이 땅에서도 바로 지금 ‘규제완화’의 미명을 탈을 쓰고 태어나고 있다는 것 아닌가?

최시중 위원장이 끊임없이 발화했고, 한나라당이 무리하게 추진했으며, 조중동이 여론과 상관없이 추인한 미디어 악법은 그 어떤 수사나 논리에도 불구하고 이 반정치·반민주·반언론의 한국형 ‘여우 제국’을 만들기 위한 조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결과는 정치의 해체, 여론의 진압, 민주의 실패다. 좀 더 좁혀서 보자면, 저널리즘의 죽음이다. 로버트 그린왈드 감독이 만든 <안티폭스>(원제 OutFoxed)는 ‘루퍼트 머독의 저널리즘을 향한 전쟁’을 부제로 달고 있다. 미디어 제국이 어떻게 저널리즘을 밑바닥으로 실추시켰는지를 생생하게 폭로한다. 비슷한 작업이 필요한가? 사악한 여우들에 의한 선한 저널리즘을 탈취·제압하기 위한 잔혹한 사냥의 게임이 이미 이 땅에서는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누가 한국형 여우 출현의 공포를 구미호의 전설 같은 한여름 납량특집쯤으로 치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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