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날치기로 미디어법을 통과시킨 날, 방송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12년 만에 지상파방송 3사가 동시파업을 벌였는데도 정작 방송에서는 결연한 투쟁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시청자들은 혼란스럽다. 조중동방송, 재벌방송의 출현이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정면으로 위협할 것이라는 언론노동자들의 외침과 방송뉴스의 느긋함이 어색하다. 방송은 미디어법이 날치기 통과된 이날 왜 이렇게 조용한 것일까.

▲ 지난 7월 22일 한나라당이 미디어법을 직권상정해 표결처리하는 모습ⓒ안현우
대한민국 국회와 헌법을 유린해가면서까지 MB악법인 미디어법을 날치기통과시킨 날, 지상파방송3사의 저녁 종합뉴스는 미디어법의 주요 내용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이 없었다. 뉴스는 또 미디어법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의 사실여부를 따져 묻지 않았다. 진보 신문이나 인터넷언론에서는 방송법 개정안의 무효논란과 한나라당 의원들의 대리투표 현장을 보도하고 나섰지만 지상파뉴스는 ‘논란의 사실’만 보도할 뿐, ‘논란의 진위여부’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 조중동방송, 재벌방송의 출현이 한국사회의 앞날에 어떤 긍부정적 효과를 가져 올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분석과 전망도 뉴스에는 없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반대하는 미디어법이 날치기 통과 되었지만, 정작 뉴스는 분노하는 대한민국 절반 이상 시민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않았다.

언론노동자들이 펜과 카메라를 두고 노동현장을 떠나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조중동, 재벌에게 방송을 주었을 때 언론을 통한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것이라 보기 때문일 터다. 12년 만의 방송3사 총파업이 말해주듯, 사태는 자뭇 심각하고 진지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 왜 뉴스에서는 그러한 결연함이 없는 것인가. 언론노동자이면서 언론인이라는 두 개의 가치가 충돌한 결과라면, 혹여 그런 이유 때문에 고뇌하며 말 한 마디, 화면 한 컷에 마음 고생했을 언론노동자들이 있다면 이제 생각을 바꿀 때가 되었다.

뉴스가 노동조합의 사적재산이거나 전유물이 되어선 곤란하기 때문에 언론노동자들의 주장과 언론인이 만든 뉴스가 달라야 한다면, 그 언론인은 거짓을 말하거나 할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YTN 노동자들이 낙하산사장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뉴스룸에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한 것은 언론노동자로서 YTN이라는 개별 사업장 뿐 아니라 한국 언론의 미래를 걱정한 표현의 방식이었다. 그것이 언론의 객관보도 혹은 공정보도와 연관될 것이라는 정치집단 방통위원회의 주장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언론노동자들이 미디어법의 처리과정과 폐해를 낱낱이 고발하는 것은 언론노동자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일 뿐 아니라, 사적자본에 한국 언론과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미래를 걱정하는 표현의 방식일 것이다. 언론노동자들의 투쟁이 총파업 거리투쟁에서뿐 아니라, 뉴스룸과 작업장 전체로 확장되어야 하고 일상화 되어야 하는 이유다.

▲ 지난 7월 23일 언론노조 노조원과 시민들이 '언론악법을 폐기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송선영
방송뉴스는 다른 매체와 달리 전파라는 공공의 재산을 위탁받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한 편의 얘기만 보도되어선 곤란하다는 고뇌도 언론노동자들에게 있었을 테다. 그러나 미디어법이 통과되기 이전과 이후는 상황이 달라졌다. MB정부, 보수집단, 부자계층의 이해와 요구만을 대변해 온 조중동이 방송을 할 길이 터졌다. 태안주민들을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 앉게 하면서도 책임을 회피한 거대 광고주 삼성이 방송을 할 날도 머지않았다. 사태의 진전과 전망은 예전과 같지 않다.

지상파방송에 종사하는 언론노동자들이 바라보고 투영해 내는 세상의 모습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정교하고 치밀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객관보도의 망령을 저널리스트의 최고의 덕목처럼 떠 받들던 태도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조중동은 이미 객관주의 언론관을 버렸다. 사주의 이해, 회사의 이해, 보수집단의 이해, 혹은 개인적 이해를 위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보고 원하는 방향으로 뉴스를 만들어 왔다. 그런 그들의 사실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객관보도는 정답이 아니다.

또한, 지상파 언론노동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시민의 편으로 향해야 한다. 사회적 갈등사안에서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사회 모순을 고발하고, 그들이 받고 있는 차별의 해결을 위해 한 발 먼저 뛰어야 한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한 쌍용차 사태에 관한 지상파 뉴스를 보자. 볼트와 너트가 사측과 경찰에 피해를 주고 있다는 뉴스보도는 있지만, 쉴 틈 없이 뿌려대는 최루액을 맨 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노동자들과 그 노동자들의 가족들이 공장 정문에서 눈물로 지켜보는 현장을 뉴스는 기록하지 않는다. 이미 지나치게 뉴스는 편파적이고 주관적이다. 조중동방송, 재벌방송이 등장해도 그러할 것인가.

미디어학자 제임스케리는 “1930년대 철강과 화학 산업이 유럽의 저널리즘을 사들이기 시작했다”면서 그것이 이후 파시즘의 번성에 대한 유럽 언론의 시각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했다. 사적자본의 이윤극대화를 위해 저널리즘이 활용되면서 유럽과 전 세계가 전쟁의 광풍 속에 내던져졌던 것처럼, 조중동과 재벌이 펼치는 보수이데올로기, 가진 자들의 논리가 또한 한국 저널리즘의 사업목표가 되어 점진적으로 사회구조와 질서를 변화시킬 날도 머지않았다.

세 차례 언론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는 언론노동사(史)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언론노동자들의 싸움이 끝까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작업장 내에서 그리고 노동과정 속에서 변화해야 한다.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예능프로그램 제작자들, 기자와 PD, 작가, 기술, 행정 등 직종을 망라해 자본과 국가권력의 협공을 막아 낼 준비를 해야 한다.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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