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미디어법이 국회 단상을 통과했다. 예상했던 대로 한나라당은 활극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국은 급랭했고 분위기는 노무현 정부 시절의 ‘탄핵정국’을 연상시켰다. 상황을 중계하는 텔레비전 화면으로 고성과 욕설이 오가는 국회 본회의장의 광경을 보면서 한 가닥 의구심이 스치고 지나갔다. 도대체 왜 이토록 정부 여당이 미디어법을 둘러싸고 무리수를 두는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던 것이다.

직권상정이 가져올 후폭풍에 대해 이들이 몰랐을 리 없다. 지난 해 촛불정국부터 올해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까지 점증해온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이 정부 여당에게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디어법 강행처리는 이런 부담을 덜어주기는커녕 더욱 가중시키는 계기를 제공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 여당은 현 상황에 대한 정치적 판단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무능한 세력인 것일까?

이번 미디어법 통과가 정치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불리한 상황을 조성할 수밖에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보여준 행보는 바로 이점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정치인이 여론을 무시하고 정치를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정부 여당이 대다수 여론을 거슬러 직권상정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빼든 것은 ‘정치’를 버리는 행위였다. 말하자면, 정치인의 손으로 정당정치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짓을 버젓이 자행한 것이다. 한 마디로 미디어법 통과는 정치인의 이해관계에서 본다면 자살행위였다.

따라서 반복해서 묻는다면, 도대체 왜 정부 여당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반하는 이런 짓을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긴 것일까? 확실한 건 하나다. 이들을 움직이게 한 동기가 결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아니었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정치인의 이해관계는 자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 있었다. 한국의 정치인은 누구를 대변하는 것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는 존재였다. 그래서 국회의원 금배지는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출세의 상징이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국민’이 잘 알고 있었다.

▲ 22일 한나라당이 미디어법을 직권상정해 표결처리하는 모습. ⓒ안현우
그런데 이번 미디어법 통과를 주도한 정부 여당의 행태들은 이런 기존의 믿음을 배반했다. 미스터리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김형오 의장은 미디어법을 민생관련 법안이 아니라고 인정했으면서도 직권상정이라는 강경수를 두어서 법안을 처리했다. 자신의 정치행로에 적잖은 오점을 남길 게 자명한 이런 결단을 내린 까닭은 무엇일까? 정부 여당에 대한 충성심에서 기인한 것일까, 아니면 보수 세력에 아부하기 위한 순진한 제스처일까? <동아일보>는 이런 김형오 의장의 결정을 두고 “김 의장 스스로도 미디어법은 민생과 관련된 법이 아니라고 규정했던 만큼 미디어법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으로 다른 민생법안이 희생돼선 안 된다는 의중도 직권상정 결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관측된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분석은 소도 웃을 일이다.

이런 발화는 그 자체로 자승자박이다. 김의장의 ‘의중’이야 무엇이든, 이 기사의 발화를 뒤집어서 보면 확연하다. 다시 말해서, 그러면 그렇게 민생과 아무 관련 없는 미디어법을 극구 밀어붙여서 민생관련 법안 처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정부 여당의 집착은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의문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시 물어보자. 도대체 왜 정부 여당은 눈만 뜨면 목소리를 높이던 민생문제마저 과감하게 외면하면서 그와 아무 관련 없는 미디어법을 강행처리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일까? 해괴하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답은 하나다. 이들은 지금까지 한국 정당정치의 정치인들이 으레 그래왔던 것과 달리, 정치인이라는 자기 이해관계의 논리에 따라서 미디어법에 목을 매었던 게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정부 여당의 정치인들이 미디어법 처리에 열을 올린 건 ‘정치인’의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그게 무엇일까?

누구는 ‘조중동’이라는 3대 보수신문들에게 방송겸업을 허가해주기 위해 이런 무리수를 두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게 설득력 있는 얘기인가? 아무리 여당 정치인들이 세 신문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해도, 혈연관계로 엮여 있지 않는 한, 이들을 위해 초개와 같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던질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문사의 방송겸업을 세 신문사 모두 찬성하고 있긴 하지만, 일정한 온도차를 충분히 감지할 수가 있다. 세 신문사 중 가장 열성을 올리는 곳은 <중앙일보>이다. <조선일보>는 처음에 열성을 올리다가 국면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망설이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물론 <동아일보>처럼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지만, <조선일보>는 그래도 똥인지 된장인지 대충은 눈치를 채고 있는 것 같다.

미디어법은 단순하게 신문사에게 방송겸업만을 허가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물론 불은 ‘조중동’이 질렀지만, 불길은 대기업 방송진출이라는 지붕으로 옮아붙었다. 신문사와 대기업이 나란히 경쟁한다면 아무리 거대 신문사라고 하지만, 자본의 규모에서 밀리는 신문사가 살아남을 수가 없다. 세 신문사 중에서 <중앙일보>가 미디어법에 가장 관심을 많이 보인 까닭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법이 전면에 내세운 ‘시장주의’는 결국 방송시장에서 가장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최적자생존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새로운 시장에서 과연 <조선일보>는 삼성 같은 대기업의 자본력을 이길 수 있을까? 과연 이 상황에서 SBS처럼 보도능력이 떨어지는 지상파 방송이 <중앙일보>의 보도방송을 능가할 수 있을까? 바야흐로 공룡들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고, 여기에서 공룡들은 서로 싸우다 공멸할 가능성이 더 크다.

이번 미디어법 통과를 지켜보면서, 과거 삼성이 포화상태에 처해 있던 자동차 시장에 뛰어들었던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때도 삼성은 시장의 논리를 내세웠지만 그 선택은 시장 자체의 궤멸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번 미디어법 강행처리도 비슷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시장의 이름으로 포화상태에 처한 시장의 경쟁을 가속화하는 것, 결국 피해자는 시청자들일 수밖에 없다. 극심한 경쟁시스템으로 인해 방송제작환경의 구조적 모순이 더욱 격화한다면, 그나마 일선의 방송제작인들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고군분투하며 만들어내던 좋은 프로그램들마저 종적을 감출 공산이 크다. 최근 각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들이 재정의 압박을 해결하기 위해 그 나물에 그 밥인 연예인들의 잡담으로 일관하는 건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앞으로 정부 여당이 주도한 미디어법이 열어 보일 세상은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면 시켰지 개선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대기업의 자본이 투여되면 방송시장의 파이가 커질 것이라는 장밋빛 예측도 이런 우려를 불식시켜줄 만큼 확실한 게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냉혹한 진짜 시장주의의의 원칙이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공룡들의 전쟁에 <한겨레>나 <경향신문>같은 작은 신문사들은 낄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미디어법은 처음부터 ‘될 놈만 밀어 주자’는 원리에 충실한 불평등한 이념을 구현하고 있다. 여론의 다양성을 지금보다 더 구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이번 미디어법 통과는 자본과 공공성 사이를 조절해야할 정치인들이 대기업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줌으로써, 국가의 관리 기능을 일거에 해제시켜버린 사건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부르주아의 이해관계가 관리를 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국가권력을 통해 집행된다면, 그건 ‘거리의 저항’이라는 직접적 힘의 충돌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정당정치라는 완충지대를 스스로 사라지게 만든 정치인들은 별 것도 아닌 미디어법을 과감하게 통과시킴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정치’를 매장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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