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통신사 UPI(United Press International)의 에드워드 F. 로비 기자는 미국의 보수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추종자로 기업은 소득세를 지불하지 않아도 좋다는 개인적 신념을 갖고 있었을 만큼 우익 성향이 강한 언론인이었다. UPI 워싱턴 지국에서 에너지와 환경전문가였던 그는 1981년 6월 5일 UPI 워싱턴 지국이 일상적으로 받아보는 정부 보고서 한 편에 주목했다. 미국 에너지성이 작성한 보고서는 모빌, 엑손, 걸프를 포함한 26개 거대 에너지 회사의 실제 세금 요율이 그들의 조정된 총소득에 비해 놀라울 만큼 낮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의 명목상 기업 소득세는 46%였지만 실제로 1979년에 미국 기업들이 낸 소득세는 23.7%였는데, 26개 거대 에너지 회사들은 석유 산업으로 고수익을 올린 시점에 그보다도 더 적은 12.4%만을 세금으로 납부했다. 로비는 국세청을 통해 이 수치가 1년에 2만달러 이상을 버는 미국 국민 한 사람이 내는 세금과 같은 비율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1981년 6월 UPI 와이어 서비스에 이 사실을 기사로 썼다.

그러자 거대 에너지 기업 모빌은 즉각 11개 주요 미국 신문에 “그들은 결코 배우려 하지 않는가?”라는 제목의 광고를 실어 로비와 UPI를 공격했다. 광고는 “미국 전역의 독자들은 정유회사의 세금에 관한 잘못된 엄청난 용량의 정보에 최근 노출되었다”면서 “정유회사가 세금을 적게 내었다고 고발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우리는 UPI가 똑바로 보도함으로써 미국 대중이 정확하고 믿을 수 있는 자료를 기반으로 판단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며칠 뒤 이번엔 동료 에너지 기업 엑손이 로비가 과거에 쓴 다른 기사를 공격했다. 합동 공격은 효과를 발휘했다. UPI는 로비에게 정유 회사의 세금 문제에 관한 심층 분석 기사를 쓰지 말라고 지시했다. 분명 로비의 상관이 정유회사에 대한 로비의 보도가 정확하다고 동의했고 로비가 쓴 기사 내용은 실제로도 옳은 것으로 판명됐지만, 로비는 얼마 뒤 UPI를 떠나야 했다. 친기업적 성향을 지닌 로비는 뉴스 보도가 투명해야 한다는 신념도 갖고 있었다.

우리로서는 언뜻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사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일이 무려 28년 전에 일어났다는 그 시간차에 주목하면, 저자가 이 사례를 굳이 자세하게 인용한 까닭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미국 언론계의 고착화된 독점 현상은 이미 1970년대에 우려할 만한 경고와 비판을 낳았다. △체인 때문에 독점을 형성한 신문은 ‘가격이 높고 수준이 낮다.’ △독립신문이 체인 신문보다 진지한 뉴스를 23퍼센트 더 많이 내보냈다. △체인 신문의 85퍼센트 이상이 일률적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다 등등…. 미국의 저널리즘 학술지 <저널리즘 쿼털리>에 실린 이 연구 결과들은 모두 1970년대에 나온 것들로 오늘날 미국 언론계의 현실에 관한 저자 자신의 진단을 뒷받침하는 논거치고는 시기적으로 한참 뒤떨어진 것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도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저자가 설명하는 ‘독점’의 내용은 이렇다. “불행히도, 모든 기업이 간절히 꿈꾸는 완벽한 시장 분배란 바로 자신이 시장의 100퍼센트를 모두 차지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독점이다.” 우려할만한 일은 실제로 벌어졌다. 불과 20년 전에는 50개를 헤아렸던 미국의 미디어 기업은 2003년에 이르러 5개의 거대 미디어 기업으로 축소, 재편됐다.

미국의 5대 미디어 기업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단단한 카르텔로 뭉쳐 미국의 여론 시장을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다. 저자가 인용한 2003년 3,4월호 <콜럼비아 저널리즘리뷰>의 조사에 따르면 뉴스코퍼레이션, 디즈니, 비아콤, 타임워너 가운데 동시에 2개 이상의 이사회에 참여하는 이사가 45명에 달한다. 또, 5개 미디어 기업이 141개나 되는 합작 회사를 통해 사업 파트너로 엮여 있다. 2000년 무렵이 되자 일간신문을 발행하는 미국 내 도시의 99퍼센트는 신문의 수에 상관없이 한 회사가 그 지역 신문시장을 독점하게 되었다. 매체의 다양성이 여론의 다양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소유주가 동일한 수백, 수천 가지 미디어가 수없이 반복해서 베낀 내용을 천편일률적으로 내보내게 되었다. 미디어가 민주주의에 약인가, 아니면 독인가 묻는다면? 저자의 답변을 들어보자. “전체 국민들을 대상으로 이들 미디어가 기획한 정치 사회적 내용물은 실질적인 효과를 만들어냈다. 바로 미국 투표자들이 전 세계 선진 민주국가 중에서 가장 제한된 투표 선택권을 갖도록 만든 것이다. 이는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그리고 무엇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도록 만든다.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미국 정계의 정치 스펙트럼은 더욱 우익으로 편향되었다.”

▲ 벤 H. 바그디키언.
미국 언론계를 사로잡은 독점의 폐해는 넓고도 깊다. 가깝게는 이라크 침공에서부터 멀게는 미-소 냉전기간에 아시아와 중남미에서 미국 정부가 자행한 갖가지 추잡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주류 언론은 미국 정부와 기업의 충실한 협력자로 행동했다. 저자의 표현대로 그런 미디어의 ‘선별적인 기억상실증’과 ‘건망증’은 이라크 침공 당시 조작된 사건으로 유명해진 제시카 린치 사건과 같은 속임수와 거짓을 통해 “세상을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국민의 능력을 손상”시킬 뿐 아니라 “결국엔 사건에 대한 사회적 지적인 반응 또한 무디게” 만들어 버린다.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의 힘 있는 거대 미디어 기업이 밤낮 없이 사람들을 덮치고 있다. 2억8천만을 헤아리는 미국인들이 접하고 있는 매체의 수를 헤아려 보자. 일간신문 1천468개, 잡지 6천개, 라디오 방송사 1만개, 텔레비전과 케이블 방송사 2천700개, 출판사 2천600개. 이토록 넘쳐나는 매체의 홍수 속에서 미국인들은 갈수록 더 인식과 사고의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더욱이 역설적이게도 비판을 당하는 기업은 독점화를 통해 또 다른 막강한 힘을 갖게 됐다. 기업이, 자신에게 비판을 가한 바로 그 저널리스트들의 고용주가 된 것이다. 또 있다. 언론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는 계층을 지칭하는 ‘신성한 암소 sacred cows’에는 소유주, 소유주의 가족과 친구들, 주요 광고주들, 소유주의 정치적 견해 등이 속하는데, 저자는 이 가운데서 미국 기업만큼 보호를 많이 받고 또한 많은 먹을거리를 남겨 주는 신성한 암소는 없다고 단언한다. “현대의 기업 시스템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비판을 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는 정도는 소련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을 공공연하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거의 완벽해졌다.” 20년 전 이 책의 초판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미디어의 힘은 정치적인 힘이다.” 문제는 미국의 미디어가 그 힘을 친기업적 가치를 촉진시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오늘날 언론은 누구로부터 요구받고 누구를 위해 뉴스를 생산하고 있는가? 소비자? 아니다. 광고주다!

한때 이 책에서 저자가 펼친 담론이 우리에게는 현실에 와 닿지 않는 진부한 얘기쯤으로 치부된 시절이 있었다. 미디어비평서의 고전이라는 이 책이 지난 20년 간 단 한 차례도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옮긴이가 이 책을 통해 “문득 한국이 미국의 미래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상황이 이제는 우리 눈앞에 점점 더 급박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미디어산업의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거창한 수사 뒤에 숨겨진 거짓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온통 반대 여론이 들끓는데도 애초의 불순한 의도를 솔직하게 토로하거나 거둬들일 뜻이 없는 태도를 보면 말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낸다면 옮긴이의 말대로 미국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선진국 콤플렉스에 빠질 이유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굳이 매달릴 필요도 없어진다. 저자는 단언했다. 5대 미디어 복합기업은 쪼개질 필요가 있다고. 압도적인 거대 미디어 기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법률과 격려를 제공했던 1996년 텔레커뮤니케이션법은 시급히 폐지되거나 전면 개정되어야 한다고. 지금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행여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면, 저자 말마따나 ‘나중에’는 나라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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