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순진한 상상력에 대한 고백부터 해야 겠다.

한 20여일 전의 일이다. 김형오 국회의장이 지난 6월26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인터넷 기업 대표들과 간담회 자리에서 “인터넷은 창의와 자율이 숨 쉬는 공간이 돼야 한다”며 “사이버 규제는 법률적으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는 언론보도를 봤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1년 동안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서 활동하다 위원장까지 역임한 김 의장은 “과거 과기정위에 있을 때 나도 스팸메일의 피해자이기는 했지만 인터넷과 아이티(IT) 산업 발전을 위해 스팸메일 단속을 법제화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가웠다. 그래서였는지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대충 이랬다. ‘김 의장은 언론악법 직권상장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엄청 부담스럽다. 한나라당의 1, 2차 날치기 기도 때와 달리 국회의장이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할 것이다. 한나라당의 방송법, 신문법 개악안은 직권상정 하지만, 포털이나 KT, SKT 등과 같은 인터넷서비스제공업자 등과 같은 온라인서비스제공자(OSP)의 게시물 사전검열 의무화, 피해자의 신고가 없이도 경찰이 자의적으로 처벌하도록 하는 사이버모역죄(모욕죄임의처벌제) 등을 담고 있는 정보통신망법은 직권상정 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김 의장의 꼼수를 경계해야 할 것 같다.’

언론악법 저지를 위해 싸우고 있는 한 정치인에게 내 이런 생각을 말했다. 바로 돌아온 대답인즉, “조 소장, 생각보다 되게 순진하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 사람은 그런 생각 할 위인도 못 되네”가 아닌가? “그래요?”라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 쪽에선 반신반의 해 왔던 게 사실이다.

사이버 규제 신중함의 표현이 직권상정인가?

난 참 순진했다. 최근 확인된 김 의장의 직권상정 법안 목록에는 정보통신망법이 시퍼렇게 포함돼 있다. “사이버 규제는 법률적으로 신중해야 한다”고 밝힌 김 의장이 정보통신망법을 직권상정 목록에 올린 것이다. 김 의장의 수중에 있는 직권상정 법안 목록은 그가 직접 작성한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청부입법은 하지 않겠다’고 밝히던 이전의 소신을 매몰차게 꺾은 셈이다.

▲ 김형오 국회의장 ⓒ민중의소리
기억력으로 놓고 보면, 김 의장은 기억력이 3초라는 붕어, 3분이라는 쥐 등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김 의장의 기억력이 그럴 리는 없다. 그러기엔 7월19일 그가 펼친 ‘꼼수’가 허락하지 않는다. 김 의장은 “언론관계법은 민생과 직결되는 법도 아니다”며 “이른바 ‘조·중·동’ 보수언론을 어떻게 참여시키느냐 하는 게 관건이다. 협상하고 타협하면 못할 게 없다”고 밝혔다. 여야를 싸잡아 비난하긴 했지만, 포화 상태의 국내 방송시장 상황을 성장 잠재력이 엄청난 블루 오션으로 둔갑시킨 한국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의 통계 조작 등을 통해 지금까지 줄기차게 민생법안이라고 우겨온 한나라당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것에 해당한다. 그리고 한나라당 개정안은 조중동이 아닌 모든 신문이 방송뉴스채널을 소유하도록 하는 게 목적이라고 부르짖어온 한나라당과 그 주변의 세력을 비판하는 것에 해당한다.

문제는 “언론관계법은 민생과 직결되는 법도 아니다 … 조중동 보수언론을 어떻게 참여시키느냐 하는 게 관건이다”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 한나라당 개정안에 반대해온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당과 창조한국당 등 언론 시민단체들과 정치권에서 요구해온 것은 간단하다. ‘지금은 신문의 방송뉴스채널 소유 기준을 규정하기 위한 근거자료조차 없으니 매체실태조사를 통해 이를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니, 언제까지 표결처리 한다거나 하는 식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었다.

언론관계법 문제는 조중동 보수언론 참여 방법에 관한 사안 아니다!

현재 국회에선 무수한 ‘비율’들이 난무한다. 한나라당이 직권상정 할 경우 개정안에 반대 투표하겠다고 말하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말하는 ‘매체합산 시청점유율 30%’라는 기준도 국내 매체시장 상황에 대한 평가도 없이 나온 것이다. 민주당이 던진 개정안도 마찬가지고, 창조한국당이 던진 개정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무수한 ‘비율’들은 다음과 같은 난점이나 방법상의 문제들을 해결한 뒤에 나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매체합산 시청점유율을 계산할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연구하고 해결해야 한다.

신문시장의 시장점유율 기준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 대상은 어디까지로 할 것인지, 신문시장에서 방송뉴스채널을 소유할 수 있는 점유율 상한선을 어느 수준에서 정할 것인지, 방송시장의 시청점유율 계산 대상은 뉴스/보도 프로그램으로 한정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프로그램으로 할 것인지, 모든 프로그램으로 할 경우, 뉴스/보도 프로그램과 기타 프로그램의 등가성을 인정할 것인지(이를테면 뉴스/보도 프로그램 시청점유율 10%와 연예/오락 프로그램 시청점유율 10%는 여론의 측면에서 똑같은 것인지), 방송시장 시청점유율과 신문시장 점유율을 어떻게 합산할 것인지(이를테면 방송 시청점유율과 신문 시청점유율을 단순 합산할 것인지 아니면 가중치를 두어 합산할 것인지), 합산 때 가중치를 둘 경우, 방송과 신문의 매체 특성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이를테면 방송 뉴스/보도 프로그램의 경우, 시청하면서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주의력이 필요 없는 반면, 신문을 읽으면서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주의력이 필요한 것 등), 매체 합산 시청점유율 상한선은 어느 수준으로 할 것인지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한 마디로, 매체시장 실태조사와 이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매체시장을 평가하는 작업, 이를 토대로 교차소유 관련 규정을 두는 작업은 몇 개월의 시간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 한나라당은 이걸 안 하겠다고 거부하며 막무가내로 자신들의 개정안을 내질러 왔다. 그럼에도, 김 의장은 직권상정 압력을 가하면서 6월 임시국회 회기 안에 ‘합의 처리’할 것을 강변하고 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으라’는 것이다.

대기업과 외국자본의 방송뉴스채널 소유 문제는 왜 언급하지 않나?

그뿐인가? 국민들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일관되게 자산규모 10조원이 넘는 대기업이 방송뉴스채널을 소유하거나, 외국자본이 방송뉴스채널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김 의장은 이런 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도대체, 김 의장은 지난해 12월부터 무얼 했는가? “언론관계법은 민생법안 아니다”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나라당 언론관계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나왔던 그동안의 쟁점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라고 하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김 의장은 절대로 붕어나 쥐 수준의 기억력을 갖고 있지 않다. “언론관계법은 민생법안 아니다”는 진실을 말할 용기가 있다면, 직권상정 하지 않는 용기도 발휘해야 한다. 김 의장이 직권을 발휘해야 할 곳은 따로 있다. 매체시장 실태조사와 평가를 위한 기구를 국회의장 직속으로 구성할 것을 직권으로 제안하는 게 그것이다.

현재 한나라당 의원들의 멘털리티는 웰빙정당답게 ‘빨리 날치기 처리하고 이미 잡아놓은 일정대로 여름휴가 가고 싶다’는 것으로 봐도 실상과 그리 다르지 않을 듯하다. 박 전 대표는 반대투표라는 소신을 밝힘으로써 여기에 제동을 걸었다. 이 점에서 박수를 받을 만하다. 자신이 밝힌 매체합산 시청점유율이 나오려면 얼마나 힘든 난제들을 풀어야 하는지 모르면서 매체합산 시청점유율 30%를 언급한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평가는 받아야 한다.

웰빙정당 출신인 김 의장은 어떤 태도를 보일까? 순진한 상상력은 그만 발휘하고 행동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말을 곱씹는다. 앞으로 김 의장의 행동이 그의 시대정신 역시 ‘뻔뻔스러움’이었는지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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