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널리 알려진 윤동주의 서시 중 한 줄이다. 명시답게 은유와 솔직한 고백이 잘 담긴 구절이다. 그런데 이 구절이 은유가 아니라 현실인 사람들이 있다. 바로 CRPS(복합부위 통증 증후군)를 앓는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시원하다고 느낄 정도의 바람이 몸에 와 스쳐도 극심한 통증을 겪는다고 한다.

<말하는대로>에 출연한 배우 신동욱에 의하면 예리한 커터칼로 온몸을 잘게 써는 느낌이라는데 말로는 알아도 실제 그 고통을 실감하는 이는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러면서 신동욱은 자신을 고통변태라고 했다. 극심한 고통과 싸워 견딜 때 희열을 느낀다는 설명이었다. 대중 앞이니 조금 웃겨 보려는 의욕이 담긴 말이었지만 정작 웃기에는 너무도 처절한 경험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JTBC <말하는대로>

이 병으로 인한 고통은 소위 마약을 최대한으로 써도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군대 복무 중에 발견된 상황에서 정신을 잃은 신동욱은 깨어나서 이가 부러지고, 피가 범벅이 된 채로 부러진 팔을 봤다고 했다. 어디 부딪힌 것도 아니고,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도 아닌데 이와 팔이 부러지는 고통이라니.

치료법은커녕 발병의 원인조차 아직 밝혀지지 않은 희귀난치병을 극복하고 다시 대중 앞에 서게 된 신동욱은 담담한 말투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무치는 감정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쌀쌀해진 날씨에 통증을 느껴 히터를 켜느라 잠시 말을 멈추기도 했다.

JTBC <말하는대로>

배우가 대중 앞에서 서면서도 가죽장갑을 낄 수밖에 없었던 것을 보면 아직도 그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신동욱의 말을 다 들은 한 시민은 극복과 희망의 아이콘이 될 거라고 감동을 드러냈다.

그런데 신동욱은 담담했지만 그의 병에 대해서는 조금 알게 되면서, 다소 엉뚱할 수 있겠지만 윤동주의 시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가을바람, 봄바람에도 아파 장갑을 껴야 하는 정도의 민감한 아픔. 시인 윤동주는 시대의 아픔을 그렇게 깊이 안고 있었던 것이다. 매주 광장에 모이는 수백만 시민들은 다른 이름의 윤동주들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날 신동욱 외에도 갓세정이라 불리는 아이오아이, 구구단의 김세정도 나와서 어린 나이지만 가난으로 겪어야 했던 마음의 어둠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또한 범죄심리학자로 유명한 이수정 교수는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공론을 제기했다.

JTBC <말하는대로>

이수정 교수는 납세자의 또 다른 의무라며 감시의 의무를 갖자고 했다. 묻지마 범죄나 혐오범죄 등에 목표가 되는 여성들의 안전을 위해 처벌보다는 정부와 기관의 철저한 감시가 필요하며, 개인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모일 때 사회가 변화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한 해에 200명 정도의 여성이 범죄피해로 의해 목숨을 잃는다니 심각한 상황이었다.

비단 범죄감시시스템만이 아닐 것이다. 짧은 시간이라 다 말하지 못했지만 이수정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부는 결국 국민들의 납세로 인해 굴러가는 것이기에 납세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국민의 안전권, 생명권이 어떻게 경시됐는지를 뼈저리게 겪은 바 있기에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말하는대로>의 말문이 점점 더 넓고 깊게 열리는 분위기를 느끼게 한 순간이었다.

“시련은 얼음과도 같아서 언젠가는 녹기 마련이다” -신동욱.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