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항상 여러분의 3분 거리에 있습니다.” 대학시절 수배생활을 하던 동기가 말했다. “난 저 말이 제일 무섭다”고. 그리고 그녀는 얼마 되지 않아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고,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3개월가량을 교도소에 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 때도, 지금도 난 그녀가 교도소에 들어갈, 그리고 경찰을 피해 학교에서 살아야 하는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듣지 못했다. 불합리했고, 비상식적이었다.

요즘에 길을 걷다보면 전경버스를 자주 본다. 사무실이 청와대 근처에 있기 때문일 테다. 광화문까지 걷다보면 어떤 날은 수십 대의 전경버스를 마주해야 하기도 하다. 하긴 사무실이 청와대 주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난해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는 검문도 당하고, “왜 늦게까지 일을 하냐”며 경찰한테 한소리 듣기도 하였으니. 남들은 좋은 동네에서 일한다며 부러워들 하지만, 보기 싫은 풍경들 때문에 때때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샛길로 빠졌지만, 요지는 전경버스에 둘러싸인 길을 걷다 보면, 전경 버스 옆에 붙어 있는 경찰 홍보 문구를 읽다보면 대학시절 수배생활을 하던 동기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는 것이다.

“경찰은 항상 여러분의 3분 거리에 있습니다.”

지난 7월 8일, 용산참사 그 현장에서 벌어진 끔찍한 동영상 한 편을 봤다. 이명박정권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용산범대위) 홈페이지에 올라온 동영상이다. 시민 5명과 경찰 1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찰의 살인진압이 있었던 용산, 그 참사의 현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8일 오전 용역업체의 철거 강행 과정에서 전국철거민연합회(이하 전철연) 여성 회원이 실신하였고, 수 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살인적인 철거를 막기 위해 전철연과 용산범대위 회원이 나섰지만, 용역반원들은 공격적으로 폭력을 휘둘러댔다. 그 과정에서 한 여성이 용역반원의 발길질에 차였다. 용역반원은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비틀거리는 여성의 머리채를 낚아채 길바닥에 내동댕이쳐버렸다. 또 한 용역반원은 항의하는 철거민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는지 어디선가 돌솥을 들고 나타났다. 용산범대위에 따르면 심지어 용역반원들은 곡괭이까지 휘둘렀으며, 곡괭이에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 용역반원이 강제철거에 항의하는 전철연 여성회원을 발로차고, 머리채를 잡고 끌고가고 있다. ⓒ 용산범대위
눈살 찌푸려지는 폭력의 현장을 마주하는 게 불편하다. 용역반원에게 누가 저리도 절대적인 ‘힘’을 ‘폭력’을 허락했던가. 3분 거리에 있다는 경찰은 어디에 있는 걸까? 3초 거리에 있었다. 영상 속에서 경찰은 채증도 하고, 무전을 나누며 유유히 걸어 다닌다. 영상 속 경찰들은 그 무자비한 폭력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 뛰어가면 3초, 걸어가도 10초 안이면 닿을 거리다. 용산범대위는 “예와 마찬가지로 용역업체와 경찰은 한몸이 되어 이들을 가로막았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명백한 불법 폭력 행위를 저지른 용역반원들은 가만 두고, 오히려 이에 항의하는 전철연 회원들만을 집요하게 가로막고 채증했다”고 덧붙였다.

참사가 발생한 지 어느덧 반년이 다 되었지만 용산은 변한 게 없다. 용역반원들의 폭력과 강제진압, 철거민들과의 극단적 대치, 방관하는 경찰과 사과 한 마디 없는 정부. 그렇게 고여 있을 뿐이다. 그리고 경찰들은 아무렇지 않게 폭력의 현장을 지켜볼 뿐이다. 방관하고, 오히려 철거민들에게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경찰은 철거민 여러분의 3초 거리에 있습니다.”

얼마 전 이사를 하면서 순찰하는 경찰을 만난 적이 있다. 지구대 경찰은 친절하게 직통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문제가 있으면 바로 전화를 하라고 했다. 얼마 전 사촌 언니 집에, 그것도 둘씩이나 도둑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낮에는 집을 비울 수밖에 없는 처지인 터라, 경찰들의 마음씀이 순간 고마웠다.

헌데, 이 모든 친절함과 상냥함이 ‘시민’일 때만 가능한 공권력의 진면을 볼 때면 역겹다. 3분만에 달려오겠다는 경찰이, 용산에서는 3초면 되는 데도 꿈쩍하지 않는 순간, 경찰이 아니라 ‘견찰’이다. ‘시민’이 ‘시위대’ 혹은 ‘철거민’과 ‘노조원’이 되는 순간이면 모든 형태의 폭력을 용인하는 경찰 앞에서 ‘시민’들은 다친다. 연행되고, 때로는 죽음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난 왜 ‘시민’이 아니라 ‘시위대’가 되었을까. 지난해 촛불 집회에 나갔다가 연행되는 ‘시민’들을 보고(경찰에게는 ‘시위대’겠지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적이 있다. 갑자기 경찰 책임자가 이야기한다. “소리 질러도 잡아.” 모기소리가 되었다. 난 ‘시민’이었고, 정부의 뻘짓에 ‘시위대’가 되었다. 그래서 ‘시위대’의 배후세력은 무능하고, 자만하는 정부다. 정부가 ‘시민’을 순간 ‘시위대’로 둔갑시킨다. 그런데 잡아간다, 때린다, 욕설을 뱉는다. 시위대가 시민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그 분과 그 분에게 ‘세뇌’된 친구들뿐이다.

그래, 용산에서 용역반원들이 곡괭이를 휘두르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데도 채증하느라 바쁜 경찰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변신을 해야겠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는 세일러문의 명언과 함께, ‘시민’인 내가, ‘시위대’로 변신을 꾀할 궁리를 꾀하고 있다. 그러니 긴장해라. 그리고 시민도 항상 경찰 3분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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