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씨를 소개합니다

아사이신문은 2000년에 별난 인기투표를 했다. 독자들에게 지난 1000년 동안 기억할 만한 일본 정치 지도자를 대보라고 요청했다. 늘 그렇듯이 그때도 사카모토 료마가 일등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가 각각 2, 3등을 차지했다. 놀랍게도 일본 64대, 65대 총리대신을 역임한 다나카 카쿠에이(田中角榮)가 4위를 차지했다. 1993년에 세상을 떠났고, 뇌물 사건으로 체포까지 당했던 그를 현대 일본 정치인 중 최고로 뽑았으니 놀랍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다나카는 일본 중의원 16선의 관록을 지니고 있다. 그의 딸이 그 선거구를 물러받았을 정도니 그의 인기는 우리가 감히 느낄 수 없는 그런 정도의 것이었으리라.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을 지녔으면서도 일본 정계를 호령하고, 몇몇 총리의 수렴청정까지 했다고 하니 그냥 넘겨버리기엔 녹록찮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1972년 중국과의 국교 회복을 행한 사실까지 기억한다면 일본인들 사이에서 인기표를 몰아갈 정치인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잊혀졌던 다나카가 다시 알려지기 시작한 건 이명박 정부 출범 후부터였다. 2008년 4월 이명박 대통령은 퇴임을 앞둔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다. 부시 대통령이 불도저라는 별명을 기자들에게 소개해도 괜찮겠느냐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물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컴퓨터 달린 불도저, 컴도저’라고 고쳐 말했다고 한다(한국일보 2008년 4월21일자). 치밀하게 계산하고, 강력하게 일을 추진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말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의 이 새로운 별명은 원조 논란에 빠질 만한 것이었다. 원래 자신을 ‘컴도저’라고 불러달라고 늘 주문했던 정치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나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컴도저’라는 별명을 달고 다녔다. 원조 공방을 하자면 당연히 ‘컴도저’는 다나카의 몫이다.

▲ 한국일보 2008년 4월 21일자 4면.
이명박 대통령이 다나카의 별명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별명을 공유하는 것 말고도 둘 간에는 여러 닮은 점들이 있다. 어렸을 때 지독히 어려운 시절을 겪었다는 사실을 공적인 자리에서 빈번히 이야기한다는 점, 정치 일선에 뛰어들기 전엔 사업을 벌였던 점 등등. 둘 다 ‘컴도저’라는 별명을 사용할 만큼 닮은 점은 거대한 토건 사업을 국가 프로젝트로 내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나카는 ‘일본열도개조론’을 내세워 토건 사업으로 국가 경제 부흥을 꾀하였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벌이는 22조 규모의 4대강 정비사업도 거대 토건 프로젝트로 볼 때 둘은 닮은 점이 많다. (문화일보의 이신우 논설위원은 이미 2003년 12월 29일 “다나카 가쿠에이를 꿈꾸나”라는 사설로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개발사업 속도를 질타한 적이 있었다).

혹 ‘다나카 구상’을 하십니까?

여기까지는 다나카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 가진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다. 이미 많은 이들이 이명박 정부의 거대 토건 프로젝트를 우려하면서 다나카 이야기를 많이 꺼냈었다. 그래서 ‘컴도저’ 이야기까지는 꽤 익숙하다. 그런데 다나카가 일본 언론의 개편에 깊숙이 개입했던 행적에 대해선 말을 아낀다. 뇌물 사건으로 나중에 언론에 많이 시달리긴 했지만 그야말로 언론으로부터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이었던 점에 대해선 입을 닫고 있다. 그 혜택은 사실상 다나카가 예전에 신문과 방송에 베푼 호의로 얻은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1957년 다나카는 우정 대신에 취임한다. 당시 우정성은 텔레비전 방송국 허가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1951년 라디오 방송국 허가는 전파감리위원회에서 맡았으나 그 이듬해부터는 우정성에서 맡아 했다. 무려 153개국의 신청이 있을 정도로 신청 러시가 일었다. 다나카는 신청자들에게 통합하기를 권하고, 서로 알선해주는 역할을 자임했다. 그 결과 각 현에 1민방, 주요 도시에 2~4개국을 허가해 텔레비전 방송 체제를 구축하고, 어느 정도 네트워크의 모습도 갖추었다. 다나카는 텔레비전 방송 구도를 구축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한다. “어디 어디의 지구의 면허는 A와 B와 C를 합병시키고, 그 소유 주식 비율은 어떻게 하고….” 빨강/파랑 색연필을 사용해 통합 상황을 점검하는 등 실무를 진두 지휘했다. 다나카는 텔레비전 방송국 허가, 통합 알선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를 지니고 있었다. 국유지 불하 등을 약속하면서까지 통합을 유도한 데는 장기적인 정치적 포석을 해두고 있었다.

▲ 다나카 카쿠에이.
당시 다나카 우정 대신의 텔레비전 방송국 허가 작업을 두고 ‘다나카 구상’이라고도 불렀다. 다나카 구상은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강화시키고, 그를 통해 정부가 면허제도라는 족쇄를 이용해 미디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신문의 손발을 묶고자 희망했다. 면허를 갱신해야 하는 방송 탓에 신문도 이해관계자가 되어 정부의 눈치를 보게 되리라는 기대를 했다. 1951년 민방 라디오를 허가할 때는 점차 민주화되어가던 NHK를 견제하려 신문사에 라디오국 허가를 내주었다. 다나카는 장기적으로 텔레비전 방송 허가를 통해 온 방송계에 훨씬 더 용이하게 국가주도형 통제를 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다나카의 부정 축재를 처음으로 다룬 언론은 일본 신문도 방송도 아니었다. 분게이 슌주(文藝春秋)라는 잡지가 처음으로 그의 혐의를 추적해갔다. 분게이 슌주의 추적을 따라가다 결정적으로 뇌물혐의를 취재한 것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일본 특파원이었다. 일본의 신문과 방송은 분게이 슌주와 외국인 기자들의 노력 이후에야 일본의 신문과 방송이 그 무거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나카 구상’이 성공을 거두는 장면이라 말한다면 지나칠까.

언론법 개정 논의가 이제 막바지에 이른 듯하다. 논의가 정점에 이를수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하나 있었다. 도대체 왜 언론법 개정에 혼신을 다할까? 경제적인 면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판가름이 났고, 고용창출 전망도 시원찮고, 많은 사람들이 원치도 않는 언론법 개정에 왜 그렇게 열심일까? 이젠 정부 여당조차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쓰던 장밋빛 전망을 내놓지 않고 있다. 자신이 없는 탓이다. 그렇다면 열심이고, 혼신을 다하는 깊은 속내는 도대체 무엇일까.

수수께끼를 풀다 풀다 흘러들어온 곳이 일본이고 다나카였다. 정부, 여당이 이곳을 조사하고 그를 따르려 했다는 물증은 없다. 하지만 그들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마지막 정착지는 그곳이다. 그래서 우울하다. 전쟁 이후에도 동북아에 긴장을 조성하고, 역사를 잊으려 하고, 남의 땅까지 넘보며 염치를 상실해간 그런 곳을 꿈꾸었다는 사실 때문에 우울하고 불쾌하다. 정치적 꼼수로 언론을 장악하고 그를 통해 시민들을 손아귀에 넣으려 했던 일본의 과거와 현재 한국의 언론법 정국을 겹쳐 보면 우울은 깊어만 간다. 미디어를 선진화하자던 정부, 여당의 구호가 그 정도였나 생각에 미치면 근심스럽기까지 하다. 언론법 개정으로 고작 그런 신세계를 꿈꾸었을 정부, 여당 시대를 살고 있다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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