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이 심상찮게 돌아간다. 청와대는 ‘버티기’로 일관하는 모드가 됐고 유력 대권주자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대안을 언급하고 있다. 15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의 ‘조건없는 퇴진’을 주장한데 이어 안철수 국민의당 전 공동대표가 조기 대선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안철수 전 대표는 16일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가 정치권이 제기하는 ‘질서있는 퇴진’에 응하지 않고 검찰조사 역시 사실상 해태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늦어도 내년 상반기에는 새로운 리더십이 나와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절대 임기를 채우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안철수 전 대표는 또 대통령의 정치적 퇴진 선언, 여야 합의에 의한 대통령 권한 대행 총리 선출, 대통령의 법적 퇴진일 포함한 향후 정치 일정 발표라는 3단계 수습 방안을 다시 언급하기도 했다.

그런데 안철수 전 대표가 내세운 3단계 수습 방안의 경우 정치권이 그간 주장해 온 ‘질서있는 퇴진’이 맞닥뜨린 딜레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즉, 박근혜 대통령이 ‘결단’을 해야 작동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결단을 내리기는커녕 성실한 자세로 받겠다던 검찰조사까지 사실상 해태하고 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정국을 만들어 보겠다는 심사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공동대표 (연합뉴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연일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것도 당분간 청와대가 이런 행보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정현 대표는 15일 비박계 인사들이 따로 모임을 구성해 지도부 퇴진을 요구한 데 대해 “명색이 도지사, 시장을 했거나 하는 분들이 그 바쁜 시간에 비행기를 타고 모여서 ‘이정현 물러나라’고 하는 게 정상인가. 지지율 10%를 넘기 전에 어디 가서 대권주자라는 말도 꺼내지 말고 사퇴하라”는 등의 막말을 쏟아냈다. 이정현 대표는 16일에도 “언동을 신중하게 하라”,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는 등 비박계에 대한 비난을 이어갔다.

이정현 대표가 이런 식의 반격에 나선 것은 검찰에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청와대의 행보에 발을 맞추고 있는 걸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어떻게든 ‘버티기’를 선택한 이상 일정 시점까지는 여당 내의 지도력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최소한 박근혜 대통령이 차기 대권주자로 점찍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돌아올 때까지는 이정현 대표가 사퇴하지 못할 거라는 전망이 제시된 바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반기문 총장이 돌아오더라도 여전히 여당 대권주자로서의 행보를 이어갈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충청권 인사인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이미 “반 총장이 병든 보수의 메시아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충청권의 민심은 새누리당의 정권재창출이라기 보다는 충청권 출신의 대통령 탄생에 더 가까운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반기문 총장이 여당과 선을 긋더라도 개인의 인기와 지역기반을 바탕으로 오히려 공격적이 정치행보를 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선다.

이런 정황은 시사저널의 김종필 전 총리 인터뷰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화제가 된 이 인터뷰에는 새누리당과 반기문 총장, 안철수 전 대표에 대한 메시지도 나와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새누리당은 결국 분당 수순으로 갈 것이다. 둘째, 반기문 총장은 상황 변화와 관계없이 대권에 도전할 마음을 갖고 있으며 자신은 그를 도와줄 것이다. 셋째, 안철수 전 대표는 순수한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반기문 총장에게 대권을 양보할 수 있다.

김종필 전 총리의 이런 언급은 얼마 전까지 여의도 언저리에서 회자되던 ‘반기문-안철수 연대론’을 떠올리게 한다. 새누리당 내에서 비박계가 이탈해 제3지대에서 안철수 전 대표 또는 국민의당 일부와 세력을 형성하고 반기문 총장이 여기에 합류할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는 거다. 박근혜 대통령이 ‘버티기’를 계속 고수하면 이 시나리오는 현실이 될 것이다. 대통령이 퇴진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야권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가 탄핵 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역풍’과 보수층 결집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역풍’이 참여정부의 사례와 같지 않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탄핵에 이르는 일정이 길어지면 결과적으로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계산도 깔려 있을 법 하다. 검찰 수사를 사실상 거부해 최순실 씨 공소장에 대통령의 범죄행위가 기재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도 최대한 탄핵 일정을 뒤로 밀어보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결국 특검과 국정조사까지 진행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경로로든 국회가 탄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면 비박계는 새누리당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에 소속된 채로 탄핵소추안에 찬성 표결 하는 것만으로는 차기 대선 국면에서 정치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친박계 인사들은 비박계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집 나가봐야 시베리아”라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명언을 되뇌이고 있는데, 제3지대에서의 헤쳐모여가 현실이 되면 이런 인식은 변화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현재로서 제3지대에서의 헤쳐모여를 추동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소재는 개헌이다. 이에 대해서는 손학규 전 의원의 행보가 심상찮다. 손학규 전 의원은 16일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대통령은 모든 권한을 국무총리에게 이양한다고 하는 선언과 함께 의전 대통령으로 뒤로 물러서 있어야 한다”면서 이후 일정을 제시했다. 여야 합의로 국무총리를 선출하고, 이를 중심으로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며, 이 거국내각이 과도정부를 이끌고, 이 과도정부는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손학규 전 의원은 21일 ‘개헌을 통한 연정권력의 제도화’ 등에 대한 토론회에 나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개헌론’은 새누리당 내의 비박계 인사들도 마찬가지로 거론하고 있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지난 15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 원인을 ‘제왕적 대통령제’로 지적하면서 “한시라도 빨리 개헌 논의에 나서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이러한 주장에는 대권주자로 꼽히는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 역시 동조하고 있다. 김무성 전 대표는 15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탈당까지 염두에 둔 걸로 해석되는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손학규 전 의원 외에도 야권인사인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전 비대위 대표, 국민의당 박지원 의원 등이 개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탄핵 정국에서 개헌을 고리로 한 정계개편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다. 이런 우려에 제동을 걸고 있는 건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인 문재인, 안철수 두 전 대표가 개헌에 부정적인 입장이라는 거다.

여기서 안철수 전 대표의 입장을 다시 한 번 볼 필요가 있다. 안철수 전 대표는 지난 7일 개헌 논의에 대해 “(현재의 개헌논의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면서 “다음 정부 초기가 올바른 시기”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안철수 전 대표는 16일 기자회견에서 ‘다음 정부’를 내년 상반기에 들어서야 할 것으로 규정했다.

만일 ‘다음 정부’가 실제적인 권력구조 개편을 포함하는 개헌 논의를 진행하게 되면 2020년 총선을 염두에 둔 ‘대통령 임기 단축론’이 다시 작동할 가능성이 커진다. 즉, 안철수 전 대표의 ‘조기 대선’ 주장은 ‘차기 대통령의 3년 임기론’으로 전화할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셈이다. ‘3년 임기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젊은 대권주자들과 ‘정치적 노인’에 해당하는 유력 인사들과의 또 다른 합종연횡을 촉발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물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야권의 눈치싸움이 더 심해지리라 예상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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