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를 통해 ‘권력’을 획득한 정권이 또 역시나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재창출해야 하는 정당이 ‘서민’과 ‘실용’을 배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권이 미숙한 나머지 그 아주 당연한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 문제이지, 일단 ‘서민’과 ‘실용’으로 돌아온 것은 예정된 수순, 정방향의 회로이다.

그렇다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환영할 순 없다. ‘명목’과 ‘실질’ 간의 거리감 때문이다. ‘당위’가 ‘행위’로 연결되지 않는 부재감 때문이다. 이제 말을 보태기에도 손가락이 아픈 수준이지만 대통령이 재래시장을 방문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물론, 아예 없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거나 진행 중인 재래시장의 현대화 작업의 경우 DJ 시절 대통령의 시장 시찰 이후 끌려나온 성과이다.

▲ 중앙일보 6월 26일자 1면.
‘서민 중심’과 ‘실용 강화론’을 전면에 내세운 이후, 정권은 노골적으로 볼멘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대통령, 청와대 수석들, 장관 가릴 것 없다. 판짜기의 강력한 ‘전형’이다.

‘서민’과 ‘실용’을 주장하는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반서민’, ‘반실용’으로 묶어두려는 프레임이다. 예컨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비정규직법의 경우를 보자. 정부와 한나라당이 그 법을 유예하는 것이 친서민적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법을 시행하는 것은 반서민적인 것이 된다. 그 법을 유예하는 것이 실용이라면 시행하는 것은 반실용, 즉 ‘이념’이 되는 것이다. 교육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교육비를 절감하는 것이 서민 대책이지, 공교육 강화와 입시 경쟁을 철폐하는 것은 실용이 아니게 된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이해시켜야 하고, 또 인지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에서 정부가 짜고 있는 판은, 프레임은 단순하되 강력한 덫이다. 가뜩이나 활동이 위축되고 있는 대안세력들에게는 더더욱 골치 아픈 문제이다. 상황은 ‘서민’과 ‘실용’을 말하지 않으면서 정부를 비판할 순 없게 됐지만, 그것을 말하는 순간 오히려 정부의 논리를 강화시켜 주는 꼴이 되는 복잡한 이중 트랩이다. 더군다나 아시다시피 이 정부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자신 이외의 모두를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는 찌질이들로 묘사해대는 극단적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서민’과 ‘실용’만 옳다고 우기는 세상의 바보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일단, ‘서민’과 ‘실용’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7/6) 하루만 해도 서너 개 이상의 꺼리가 나왔다. 그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경제와 교육만 보자. 한국의 경제 규모가 세계 15위로 4계단이나 주저앉았다. 서울시교육청의 연구 용역에 따르면, ‘영어 몰입 교육’이 아무런 효과도 없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가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실책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민란’ 수준의 봉기를 맞지 않고 그럭저럭 넘어가고 있는 상황을 불가사의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주변에 여럿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재개발’ 때문이다. 도시와 농촌 가릴 것 없이 사업소득이나 임금소득을 축적하는 것으로 미래를 담보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물가상승률과 소비문화의 전면화 이후 월 단위 소득은 그저 입에 풀칠을 하는 용도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망하는 재산 증식의 가장 현실적인 경로는 어떻게든 우선 집 한 채를 만들고 그 집을 고리로 하여 부동산 불로소득을 통해 재산을 늘려가는 것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이른바 ‘슈퍼청약주택’ 가입 소동은 이 경로의 신봉자가 얼마나 많은지를 간단히 증명했다. 말하자면, 이명박은 이 재개발 매트릭스의 네오로 존재한다. 갖은 비난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그가 온갖 종류의 ‘삽질’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실제로 그가 ‘삽질’에 대한 무한한 경외를 갖고 있는 점도 있겠지만, 그의 ‘삽질’에 걸려 있는 서민의 소망을 그가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이명박 대통령이 그럭저럭 버텨온 건 역설적이게도 실물 경제를 이끌고 있는 부단한 ‘삽질’과 어찌되었건 준수한 수준의 경영 성과를 내며 버티고 있는 ‘대기업’의 국제 경쟁력의 이 두 축이었다. 그런데 이게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주저앉고 있다. 정부가 아무리 ‘프렌들리’를 외쳐대도 대기업들은 돈을 쌓아둔 채 투자를 꺼리고 있고, 주택담보대출로 이뤄가는 부동산 놀음이 끝물이라는 건 정부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고 있다. 이 두 가지와 연동되어 거시경제 지표의 총합과 같은 GDP와 GNP가 수년째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상징적이다. 경제규모가 15위로 또 주저앉았다. 그럭저럭 끌고 가기조차 벅찬 상황이 조만간 닥칠지도 모른다는 적색등이 점멸됐지만 MB는 낙장불입, 못 먹어도 고, 내년에는 좋아지리만을 외치고 있다.

다음은 교육으로 가보자. 경제보다 더욱 심각하다. 서울시교육청이 연구용역한 결과에 따르면 영어몰입교육과 영어 실력의 향상에는 별다른 상관관계 내지는 인과관계가 없다고 한다. 지난 2월에 이미 연구 결과가 나왔는데, 그동안 쉬쉬해왔다고 한다. 영어건 국어건 간에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선 몰입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몰입이라고 하는 행위의 속성상 어쩔 수 없이 개인적 차원의 실천이지 구조적 차원의 강제로 이뤄질 수 없다. 이 간단한 상식이 온갖 잡소리들을 달고, 비싼 값을 지불하고, 겨우겨우 입증된 셈이지만 이마저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던 것이다. 영어몰입 교육이 효과를 발휘한 데는 정작 다른 곳이다. 진보신당 송경원 연구원에 따르면 영어몰입교육 시행 이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 사교육 시장의 성장은 눈부시다. 2008년 기준으로 ‘아발론은 139.3%, 정상 JLS는 76.2%, 청담러닝은 32.1%’의 매출 증가를 보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영어몰입교육으로 영어실력이 좋아진다기 보다 영어 사교육의 활성화가 영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솔직한 얘기일 것이다. 교육 정책을 펼 때마다 사교육시장의 획기적인 활성화에 이바지해온 정부가 난데없이 사교육비 절감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설레발을 치는 꼴이다.

정권의 부침과는 상관없이 제 몫은 해내는 기업들조차 끌어내지 못하고 ‘삽질’ 이외엔 아무런 콘텐츠도 없는 경제에 관한 완전한 무능력함과, 효율과 성과를 내겠다며 시도한 정책이 실제론 아무런 교육적 효과도 없다는 것을 고백조차 하지 못하는 완벽한 무지함이 뒤범벅된 정권이다. 그렇다. 그래서 전여옥의 말마따나 소위 ‘떡볶이 논쟁’은 쓸데없는 짓이다. ‘서민’과 ‘실용’은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떠나보낸 이야기이다. 국정운영의 총체적 난맥에다 부문별 정책에 있어선 아예 정신줄을 놓고 있는 정부가 함부로 읊기에 ‘서민’과 ‘실용’은 너무 고차원적인 단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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