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9월 28일 <워싱턴 포스트> 1면에 놀랄만한 기사 한 편이 실렸다. 천부적인 재능과 탁월한 글 솜씨로 촉망받던 젊은 흑인 여기자 재닛 쿡(Janet Cooke)은 ‘지미의 세계’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서 헤로인에 중독된 여덟 살짜리 어린이의 일상을 날카롭고도 섬세하기 그지없는 시각으로 생생하고 통렬하게 그려냈다.

여덟 살 지미는 3대째 헤로인 중독자다. 엷은 갈색 머리의 조숙한 소년으로 윤기 나는 갈색 눈을 가졌으며 가느다란 갈색 팔의 어린애같이 부드러운 피부에는 주사바늘 자국이 주근깨처럼 드러나 있다.

지미는 워싱턴 남동부의 안락하게 꾸며진 거실에 놓인 커다란 베이지색 안락의자에 기분 좋게 파묻혀 있다. 그가 옷, 돈, 볼티모어 오리올스, 그리고 헤로인으로 이루어진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의 작고 둥근 얼굴은 천사 같았다. 지미는 다섯 살 때부터 마약중독자였다.

지미가 사는 집, 어머니, 지미에게 정기적으로 헤로인 주사를 놓아준 어머니의 정부(情夫)에 대한 상세한 소개까지 친절하게 덧붙인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론은) 지미의 왼쪽 팔꿈치 바로 위를 잡고 힘센 손으로 어린아이의 작은 팔을 꽉 쥐었다. 바늘은 마치 갓 구운 빵 가운데에 빨대를 꽂아 넣듯 소년의 부드러운 피부 속으로 들어갔다. 주사기 속의 액체가 밀려나가자 밝은 피가 들어찼다. 그 피도 다시 소년에게 주사되었다.

지미는 그러는 동안 눈을 감고 있었지만 이제는 눈을 뜨고 방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흔들의자에 기어 올라가서는 머리를 푹 수그렸다가 똑바로 곧추세웠다가 했다. 그건 중독자들이 말하는 ‘도취상태’였다.

▲ 재닛 쿡(Janet Cooke)
‘베이컨을 태울 만한’ 이 기절초풍할 기사는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찍이 그 누구도 접해본 적 없는 어린이 마약중독자의 생생한 일상은 워싱턴을 엄청난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편집국 전화기에 불이 났고, 곳곳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미국과 전 세계 300개 이상의 신문에 기사가 배급됐다. 경찰은 지미와 가족을 찾기 위한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피로 신문 편집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재닛 쿡은 이 기사 한 편으로 자신의 가치를 여지없이 입증해냈고, 결국 이듬해인 1981년 4월 13일 특집보도부문 퓰리처상을 받기에 이른다.

문제가 터진 건 쿡이 퓰리처상을 받은 바로 그 날이었다. AP통신과 쿡이 한때 일했던 지역신문이 쿡의 경력에 관한 기사를 동시에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AP의 기사는 쿡이 바사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고, 털리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파리의 소르본대학을 다녔다고 소개했다. 반면, 쿡이 일했던 지역신문은 쿡이 바사대학교를 고작 1년 다녔고, 털리도대학에서는 대학 졸업장만 받았으며, 소르본에 다닌 경력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바사대학교의 입학 담당관과 AP의 부사장 겸 편집인이 <포스트>에 비슷한 시각에 전화를 걸어왔다. ‘약간의 문제’가 확인됐다.

쿡이 자신의 경력을 속였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포스트>는 그 누구보다 이 사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밝혀내자는 목표를 세우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신문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옴부즈맨 윌리엄 그린에게 즉각 사건의 진상을 밝히도록 했다.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던 쿡은 퓰리처상을 받은 지 이틀 만에 기사를 모두 날조했음을 고백했다. 여덟 살 마약중독자 지미도, 동거하는 어머니의 정부도 없었다. ‘재닛 쿡’은 미국 언론에서 최악을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나흘간의 작업을 거쳐 1만 8천 단어 분량의 기사가 만들어졌고, <포스트>는 이 기사를 1면을 포함해 모두 4개 면에 대대적으로 실었다. 기사를 쓴 옴부즈맨 그린은 “저널리즘의 약점이 노출됐다.”고 적확하게 지적했다. “에디터가 한 기자에게 준 신뢰”가 약점이었다는 것이다. 쿡은 사표를 냈고, 퓰리처상 64년 역사에 처음 가짜 기사로 상이 반납됐다. 워터게이트 특종으로 쌓아 올린 신문의 명성은 일순간 추락했다. 워터게이트의 주역 밥 우드워드는 쿡이 소속된 수도권 뉴스 담당 부국장이었다. 이 사건은 우드워드를 비롯한 <포스트>의 워터게이트 주역들에게 두고두고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발행부수 16만 부. 워싱턴에 있는 4개 일간지 가운데 3위였다. 해마다 100만 달러씩 적자를 냈다. 1900년대 중반 내내 <포스트>는 정체되어 있었다. 이 작은 지역신문의 성장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1971년 6월 13일 <뉴욕 타임스>가 ‘펜타곤 페이퍼’라는 초대형 폭탄을 6개 면에 대대적으로 실었고, 아무런 정보가 없었던 <포스트>는 경쟁지 기사를 베껴 써야만 했다. 편집인 벤 브래들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우리는 문단을 바꿀 때마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이라고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우리 눈에만 보이는 피가 흘렀다.”고 술회했다. 미국 법무성은 사상 처음 <뉴욕 타임스>를 상대로 특정 기사를 보도하지 못하게 하는 강제명령을 받아냈다. <뉴욕 타임스>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포스트>는 펜타곤 페이퍼 4000여 페이지를 뒤늦게 입수했고, 법원의 보도 금지에도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은 결단을 내렸다. “오케이, 갑시다. 보도합시다.” 펜타곤 페이퍼의 경험은 <포스트>에 값진 선물을 주었다. 그레이엄 일가와 편집국의 신뢰가 견고해진 것이다. 이것이 곧이어 터져 나온 워터게이트 국면에서 <포스트>가 끝까지 맨 앞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포스트>는 워터게이트 보도가 계속될 수 있게 한 ‘엔진’이었고, 한낱 지역신문에 불과했던 <포스트>는 단숨에 일류신문으로 성장했다.

▲ 벤 브래들리(Ben Bradlee)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과 벤 브래들리(Ben Bradlee) 편집인의 회고록 <워싱턴 포스트 만들기>에서 재닛 쿡 사건은 퍽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그만큼 사건이 준 충격이 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포스트>의 가장 중대한 시기에 편집국에서 29년을 일하며 <포스트>를 일류신문으로 성장시킨 브래들리는 재닛 쿡 사건을 “내 생애 최악의 순간”이라고 했다. 신문사가 받은 타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워터게이트의 주역들은 줄줄이 비난받았다. 그러나 워터게이트는 <포스트>로 하여금 주저 없이 재닛 쿡 사건을 가장 발 빠르고 자세하게 보도하겠다는 결정을 가능하게 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자신의 몫으로 남겨진 잘못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던 닉슨의 모습이 반면교사가 된 것이다. “워터게이트 덕분에 나는 정말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진실이 최선의 방어이며 완전한 진실이 최선의 방어라는 점이었다.” 우리로서는 잘 믿기지 않는 이런 객관적이고도 철저한 자사 비판 역시 <워싱턴 포스트>를 일류신문이 되게 한 또 하나의 밑거름이었으리라.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제 밥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 언론이 선진국의 일류언론으로부터 먼저 배우고 들여와야 할 것은 그들의 선진적(?) 이익 창출 시스템이 아니라 재닛 쿡 사건에서 <포스트>가 단적으로 보여준 것과 같은 ‘일류언론의 자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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