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일 오브 테일즈’는 이탈리아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잠바티스타 바실레의 동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그의 동화는 신데렐라나 장화 신은 고양이, 헨델과 그레텔 등 다수의 동화에 영향력을 끼친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영화는 바실레의 50여 작품 중 세 작품을 선별해 시나리오로 만들었고, 제 68회 칸느영화제 공식 경쟁작에 출품된 작품이다.

영화 <테일 오브 테일즈> 스틸 이미지

동화는 아이들이 주독자이지만, 때로 호러영화 뺨치는 잔혹성이 가미되었음을 찾을 수 있다. 가령 ‘콩쥐팥쥐’에서 팥쥐는 죽음을 당한 다음 인육으로 만든 젓갈이 되고, ‘빨간 구두’는 춤을 주체하지 못하는 신발이 벗겨지지 않아 신발을 신고 있는 두 발을 잘라야 했다는 등, 어린이가 아닌 성인이 읽더라도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영화는 어린이가 읽을 만한 탈색된 동화 수위가 아니라, 탈색되기 전 잔혹동화의 원형을 지녔다고 보아도 될 만큼 영상의 수위가 조금 높다.

‘테일 오브 테일즈’는 동화 속 세 가지 옴니버스식 스토리를 영화라는 하나의 스토리 안에 담아내면서 다층적인 메시지를 갖는다. 가령 원치 않는 결혼을 하는 공주의 성장담, 아름다움에 대한 비이성적인 집착에 대한 경고, 견고한 우정에 대한 예찬 등 다양한 메시지가 옴니버스식 스토리 가운데 녹아있다.

영화 <테일 오브 테일즈> 스틸 이미지

영화의 세 가지 다른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찾으라고 한다면 ‘집착에 대한 경고’라고 본다. 고대 이집트인은 행복이 과하게 찾아온다고 생각되면, 분수 밖으로 넘쳐 들어오는 행복을 일정 부분 거둬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자신의 분수 이상으로 행복을 맞이하다가는 앞으로의 행복에 대한 기대 지수가 지금보다 높아지는 걸 우려함이고, 행복 이후에 다가올 불운을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신념 때문이었다고 하니, 요즘 사람들로서는 이해되지 않을 법한 사고방식이다.

지금의 현대인은 어떤가. 고대 이집트인과 달리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행복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고 보는 착각 가운데서 살지 않은가. 영화 속 세 주인공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행복 이상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휘브리스(hubris)를 갈망하다가 그만 하마르티아(hamartia)의 늪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행복 이상의 집착을 추구할 때 어떤 비극이 개인 앞에 엄습하는가를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성인판 잔혹 동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 <테일 오브 테일즈> 스틸 이미지

그런데 신기하다. 이 영화에서 요즘의 정국과 딱 들어맞는 코드를 찾을 수 있다. 그것도 청와대와 관련된 코드를 찾을 수 있어서 마냥 신기했다. 세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의 이야기 중 일부만 소개하겠다. 공주의 아버지인 왕이 사랑하는 애완동물은 개나 고양이 같은 정상적인 애완동물이 아닌 벼룩, 왕 자신의 피를 먹이며 키우고, 벼룩이 놀 수 있는 장난감을 만들다가 중요한 재정을 결재하는 국사의 책무를 등한시하는 등, 벼룩을 사랑하는 왕의 직무 유기가 세 번째 에피소드의 초반부에 제시된다.

이쯤 되면 박근혜가 청와대에 입성하고 난 다음부터 벌어진 기괴한 국정 논란을 떠올리기 쉬울 것이다. 국정을 책임져야 할 왕이 애완 벼룩과 함께 놀아나는 영화 속 이야기에, 샤머니즘적인 친구 또는 책사에게 국정을 일임한 무책임한 대통령을 오버랩하는 건 우연의 일치 치고는 기막힌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이탈리아의 동화와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기괴한 일이 실제 이 땅의 대한민국에서 지속적으로 자행되었음에, 영화를 보는 내내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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