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이었다. 황보관의 캐논슛이 스페인의 골망을 갈랐던 것은…. 나는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축구광이었던 형은 “막둥이가 보면 꼭 진다”는 말로 가족들을 설득했고, 온갖 무언의 압력에 나는 잠을 청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보관의 골로 잠에서 깬 나는 마루 한켠에서 몰래 축구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관심을 갖자마자 우리 수비진은 갈짓자를 그리며 스페인의 공격에 농락당했다. 결과는 3 대 1 패배. 패배의 좌절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까까머리 ‘행님아’는 장탄식 뒤에 나의 엉덩이에 불꽃 캐논슛을 날렸다. (지금은 체육 선생님이 됐다.)
 
그리고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 나는 축구를 보지 않았다. 때로는 화장실에서, 때로는 옥상에서 별을 보며 승리를 기원했다. 그리고 순간의 함성이 골이냐 아니냐와 자살골의 경우에 탄식의 느낌이 좀 더 음울하다는 정도? 안보면 멀어진다고, 그 이후 나는 축구를 멀리하는 별종 시골소년이 됐다. 그러다가 불쑥 조국의 안녕을 잊고 나의 욕망에 어두워 축구경기를 본 날이면 어김없이 우리 팀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무기력한 경기로 일관했다. (가장 극적인 순간이 98년 월드컵 당시 하석주의 왼발 프리킥 골의 함성을 듣고 TV 앞으로 달려갔다가 곧장 골을 먹는 장면을 봤을 때다. 그 때 이후로는 정말 인연을 끊으려고 마음을 먹었다.)
 

▲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한 장면. ⓒMBC
그리고 운명의 2002년 월드컵, 붉은 애국의 함성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참여한 단체응원에서도 나는 축구에 집중하지 않았다. 대신 <네 멋대로 해라>(박성수 연출)라는 드라마를 만났다. 왠걸. 그 때 문득 깨달았다. 내가 과도한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며 무언가를 지켜보면 쓰라림을 겪게 되는 대상이 축구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돌이켜보면 표민수 피디의 <거짓말>이 재미를 못본 것도, <네 멋대로 해라>만큼이나, 말하자면 나의 닥본사(닥치고 본방 사수)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 이후 표 피디의 작품 중에 내가 보지 않은 <풀하우스>는 대박을 냈고, 꼼꼼하게 지켜본 <인순이는 예쁘다>는 역시나….)

따져보면, 예능 프로그램도 나의 징크스에서 비켜가지 않았다. 지금도 내가 오마주를 서슴지 않는 <무한도전>은 사실 내가 본방을 사수하지 않은 결과물이기도 하다.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내가 무직자 신세로 “대한민국 예능사에서 최고의 프로그램이 나왔다”며 설레발을 치던 무한도전의 ‘무모한 도전’ 시절 시청률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내가 개인사를 이유로 본방이 아닌 재방송을 시청하게 되면서 무모한 도전은 무한도전으로 바뀌었고 최고의 예능프로그램이 됐다.

그래도 그러려니 했다. 내가 누군가가 목을 매는 시청률에 신경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방송 담당기자를 맡게 되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재미로 보든, 일로 보든 나의 닥본사가 그 프로그램에 암운을 드리운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백해야겠다.

나는 송혜교·현빈 주연의 <그들이 사는 세상>을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꼽으며 한 회도 빠짐없이 지켜봤다.

이름없이 사라져간 문화방송 예능 프로그램 <일밤>의 ‘대망’을 두고 별점 다섯 개도 모자라다며 전회 시청했으며(저주받은 시청률로 조기종영), 일밤의 프로그램을 아직도 보고 있다.(일밤의 계속되는 불운이 내 본방 시청때문이라면….) 주연배우의 인터뷰 거절에 뿔이나 어디 얼마나 잘되나 보자며 <공포의 외인구단>을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지켜봤으며, 한 달이 넘게 인터뷰 요청을 고사한 최지우의 <스타의 연인>을 빠지지 않고 전부 시청했다.

물론 그 프로그램들은 모두 고난을 면치 못했다.

문제는 앞으로다.

인터뷰, 리뷰 등 이러저러한 이유로 <결혼 못하는 남자>와 <파트너>를 보고 있으며, 민효린 인터뷰를 목적으로 초반부 <트리플>을 보다가 다른 드라마에 눈이 팔린 상태다. 그리고 시청률은 신기하게 나의 시청패턴에 연동되고 있다.

하나 더 고백해야겠다.

최근 노골적으로 꼬박꼬박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하나 생겼다. 힌트를 좀 주자면, 편파를 일삼는 특정 채널의 새소식 전달 프로그램이다. 곧 채널을 돌려버리지만, 초반부에 늘 등장하는 한 사람과 그를 추종하는 인물군들을 나는 노골적인 ‘적의’를 가지고 쳐다본다.

미신에 불과하다고?

맞다. 얼마 전 방송면을 차지한 <내 몸에 귀신이 산다>(6월 15일자 보도)의 취재 당시 빙의(귀신이 몸 속에 들어오는 현상)가 됐다며 귀신이 보인다는 한 출연자 또한 “기자님 뒤에 귀신 있다”고 쓰러지듯 주절거렸다. (물론 그날 이후로 며칠간 잠잘 때 불을 끄지 못했다.) <내 몸에 귀신이 산다> 편에서 특별출연한 외국인 목사는 빙의자를 취재하고 있는 나를 빙의자로 착각하고 나에게 한마디 건네기도 했다. “다 잘 될 거야!”(의역하자면 그렇다.) 앞으로 또 어찌될지는, 두고보면 알 일이다.

2005년 <한겨레>에 입사했다. 탐사보도팀, 경제부, 사회부 등을 거쳐 지금은 문화부 방송담당기자로 있다. 놀이전문기자가 돼 보겠다고 기자가 됐으나 아직은 여행보다는 여행기를 좋아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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