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상을 해보자.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이고 ‘상상’임을 확실히 못박아두는 바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실제로는 그럴 만한 정치력이 없지만) 한나라당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어, 자신이 연임할 수 있게끔 헌법을 개정하고자 시도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가 이미 겪어서 아는 바와 같이, 거리에서의 항의 시위나 시민단체 및 야당의 반발 따위로는 그의 의지를 가로막을 수 없다. 급기야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완성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 바로 ‘그 일’이 터져버리는 것이다.

온두라스의 상황이 바로 이렇다. 지난 토요일, 호세 마누엘 셀라야(Hose Manuel Zelaya) 온두라스 대통령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관저의 침실에 들어갔다. 비록 대법원은 대통령이 위법 행위를 했다고 두 차례에 걸쳐 선고한 바 있고, 육군과 해군에서도 직접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하지만 셀라야 대통령은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복면을 쓴 군인들이 그를 깨우기 전까지 그가 무슨 꿈을 꾸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그가 추진하던 헌법 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예정된 날의 아침이었다.

이른 아침 체포되어 파자마 차림으로 코스타리카로 이송된 그는, 쿠데타에 굴하지 않고 세계 각국에 자신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셀라야 대통령의 정당성을 확인했다. 반미주의의 기수라 할 수 있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셀라야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유엔에서도 쿠데타를, 당연한 일이지만,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분위기이다. 온두라스 의회는 재빠르게 셀라야 대통령을 ‘전 대통령’으로 규정하고 국회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온두라스 국내의 정확한 반응을 알 수는 없지만, 쿠데타 세력이 고립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 헤럴드경제 6월 29일자 14면.
지난 칼럼에서 필자는 ‘적법’한 선거에 대한 의혹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이란 사태를 살펴보았다. 그 사건을 두고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옹호를 운운하는 것은 상스러운 행동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정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국민투표를 한다면 개헌에 성공할 수 있고, 헌법을 바꾼다면 대통령직을 연장할 수 있는 ‘적법’한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 나라의 실제 정치 상황만 놓고 보자면 쿠데타를 저지른 군부와 법원에게 어쩌면 더 정당성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일제히 셀라야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번에도 문제의 핵심은 ‘민주주의’에 달려있는 것이다.

냉전시대가 끝난 이후, 자본주의/민주주의는 ‘외부’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일당 독재는 역사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대한민국의 북쪽에 위치한 세습왕정국가도 스스로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칭하는 세상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모든 나라의 모든 정치가 다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 아닌 나라가 없다. 정치적 선악을 판단하는 일은 ‘민주주의냐 민주주의가 아니냐’라는 질문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해졌다. 지금 온두라스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바로 그렇다.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쿠데타는 반민주주의이고 선거에 의해 선출된 행정부 수반 대통령의 통치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헌법기관에서 반대하는 개헌을 강행하는 대통령의 통치도 과연 민주적인 것인가? 그따위 국민투표가 벌어지는 일이 과연 민주주의의 이념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민주주의의 ‘외부’가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코 쉽지 않다. 민주적인 절차 혹은 투표를 통해 헌법을 바꾸고 통치하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 민주주의의 보증수표가 된다면, 우리는 나치의 독일 지배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 한국일보 7월 2일자 16면.
그렇다고 해서 온두라스에서 벌어지는 것과 같은 초헌법적 행위를 용납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대한민국의 짧은 역사 속에서 그런 일을 겪어보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 전국은 무질서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 어떤 정치집단도 정국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데모를 하지 말자’는 데모마저도 벌어지고 있던 것이 당시의 ‘직접민주주의’가 낳은 풍경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박정희와 일당들의 쿠데타를 내심 환영했다. 더군다나 그 군인들은 ‘우리는 질서가 확립되면 즉각 권력을 민주적인 정부에 이양할 것이다’라고 선언까지 한 상태였다. 그래서 공화당을 만들어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민주후보’로 출마한 후, ‘민주적’으로 적법하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나마 한 줌의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마저도 수십 년간 유예되고 말았다. 세상에 ‘민주적인 쿠데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던져놓았던 질문을 다시 펼쳐보자. 반드시 이명박 대통령이 아니어도 좋다. 아무튼 누군가가 임기 연장을 위한 개헌을 시도하고 있고, 바로 지금처럼 의회정치와 대중민주주의가 현실적인 변화를 추동해낼 만한 원동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그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나는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한 대통령의 집권 연장을 위한 개헌 시도마저도 민주주의인가? 아니면 그 개헌독재를 저지하기 위한 쿠데타를 지지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인가?

이건 마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을 연쇄살인범 직쏘(Jigsaw)가 던지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다. 엄마가 좋다고 하면 아빠를 먼저 죽일 테고, 아빠가 좋다고 하면 엄마를 먼저 죽일 것이다. 그 어떤 답을 선택해도 민주주의는 사지절단 당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우리는 아직 미궁 속에 갇히지 않았다.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의회를 장악하지 못했다. 또한 그는 국민투표를 발의해서 헌법을 개정할 수 있을 만한 인기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한민국의 헌법 체계 하에서 적법하게 선출된 정당한 대통령이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민주 대 반민주’ 따위의 정치‘세력’에 대한 논의를 이제는 폐기처분하고, 대신 국민들의 실제 삶으로부터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고 완성시킬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추상적인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집단 차원에서만 논의되는 민주주의, 절차적으로만 정당한 민주주의는 언제나 기득권층에게 훨씬 더 유리한 법이다. 당장 내일 쿠데타가 벌어져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 오사카로 망명을 떠난다고 가정해보자. 오바마 미 대통령이 누굴 지지해줄 것 같은가? Yes, he can.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탈냉전시대의 민주주의의 풍경이다. 시인 김수영의 말처럼, 민주주의의 싸움은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하...... 그림자가 없다’).

<드라마틱>에서 수습기자 및 취재기자로 일했고, <Foreign Policy> 한국어판의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1세기를 규정짓게 될 키워드에 대한 단행본을 집필 중이며, 옮긴 책으로는 <아웃라이어>가 있다. 고려대 법학과 졸업, 현재 서강대 철학과 재학중.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