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입대 전까지 그냥 살았습니다. 시간이라는 커다란 조류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가는 방향대로 떠내려가는 플랑크톤 인생이었죠. ‘나’라는 사람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 없었습니다. 책을 읽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대학교 1학년 당시, 가장 최근에 읽은 책 목록에 초등학교 시절 독후감 숙제를 위해 읽은 <어린왕자>나 <갈매기의 꿈>이 올라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책을 읽지 않으니 생각도 없었고, 절 둘러싼 환경에 무심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의 강 속에서 흐느적거리며 살다 군에 입대했습니다. 일과 후 남는 시간이 무료해 책을 읽었습니다. 소설, 중고생용 철학서, 그리고 칼럼 모음집 등을 주로 읽었습니다. 2년간 나름 독서인으로 성실히 살았습니다. 제대할 무렵 절 둘러싼 세상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고민도 했고요. 고민을 하자 시간이란 강이 절 어디론가 정신없이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제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생각했습니다.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선 때로 강의 흐름을 거스르기도 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제가 살아가는 세상을 끊임없이 둘러보고, 시간의 강 속에서 부유하는 제 위치를 인지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이후 좀 더 본격적인 독서가 시작됐습니다. 저만의 개똥철학도 형성됐습니다. 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어려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회의 문제점도 인식했고요. 시간의 강을 부유하던 플랑크톤은 서서히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몸짓하는 작은 피라미로 성장했다.

보통 플랑크톤에서 피라미로 성장하는 과정엔 외부의 환경 변화가 영향을 미칩니다. 아버지 사업이 갑자기 망하고, 사랑하던 여자 친구가 날 떠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외톨이 생활을 경험하고, 일찍부터 돈을 벌기 위해 손에 기름을 묻혀야 했고 등등. 잔잔했던 시간의 강에 파문이 일어나면, 플랑크톤도 자각하기 시작합니다. 당연하게 여겨지던 주변 환경은 플랑크톤에게 고민을 강요합니다. 고민 속에서 플랑크톤은 나와 세상을 인지하게 되고, 피라미를 거쳐 숭어나 연어로 성장해갑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지극히 평온한 강가에서 살아갑니다. 피라미가 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성인 플랑크톤으로 성장합니다. 그들은 고민을 해본 경험이 없습니다. 때문에 성인 플랑크톤은 조류에 따라 사고합니다. 조류가 오른쪽이면 오른쪽으로, 왼쪽이면 왼쪽으로 생각합니다. 기존의 사고를 고스란히 체화합니다. 자연히 성인 플랑크톤은 사회의 주류적 사고를 형성하게 됩니다.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강은 경쟁과 효율성을 향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도도하게 가로지르는 강은 사회의 시스템을 비판하는 약자들은 결국 경쟁에서 도태한 패자로 지목하고, 그들의 아우성은 경쟁이 가져 온 사회의 효율성을 발목 잡는 행동으로 규정합니다. 그 강 속에서 자라난 성인 플랑크톤의 생각도 마찬가집니다. 내 발목을 잡는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은 불법적 행동이고, 공장을 점거한 쌍용 노동자들의 절규도 회사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일학자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을 읽었습니다. 그는 학창시절 재일교포로서의 정체성 혼란을 겪었습니다. 나름 그가 머문 강가에 큰 파문이 인 셈이었죠. 요동치는 강물 속에서 그는 고민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성장해 갔습니다. 그 시절을 겪은 고민을 통해 강 교수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고민이 갖는 힘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강제수용소를 체험한 것으로 유명한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의 말 “호모 페이션스(고민하는 인간)의 가치는 호모 파베르(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보다 더 높다”를 인용하며, 고민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책은 돈, 사랑, 앎, 청춘, 노동 등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주제에 대해 고민한 결과를 담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고민의 항해에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가 동참합니다. 그가 전하는 고민의 내용은 체계적이지 않지만, 번뜩이는 지혜를 엿볼 수는 있습니다. “자기의 성만을 만들려고 하면 자기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궁극적으로 말하면 자아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고민했던 지식인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는 고민을 통해 시대의 거친 격류를 멈추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그 흐름에 휘말리지 않고 시대를 꿰뚫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고민의 힘은 거기에 있습니다. 고민은 자신과 세상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동시에 나와 세상을 연결해줍니다. 세상과 연결된 나는 나만의 성공보다는 함께의 성공을 추구하게 됩니다. 사회의 숨은 약자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갖게 되고요. 자연히 세상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상은 어떨까요. 세상은 점점 정글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한 방송국에선 500명의 계약직이 해고됐습니다. 쌍용차에선 해고된 노동자들과 사측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극장에선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는 ‘대한뉴스’가 부활했습니다. 검찰은 개인의 이메일을 조사, 공개하며 한 방송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매도하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광장은 차단된 지 오랩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함께 잘살자는 희망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직 정글 속에서 나만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치열합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주변에 어떤 참극이 벌어지건 묵묵히 나만의 길을 가는 플랑크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강이 워낙 탁하기도 했지만, 무수한 플랑크톤들도 피라미로 성장하려는 고민을 전혀 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한 번쯤이라도 경쟁을 강요하는 도도한 흐름에 의문을 제기했다면, 일어나 저항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사회가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했을 겁니다. 비슷한 시기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을 읽었습니다. 글쓰기를 위해 읽은 책이었지만, 동시에 이외수 선생이 깨달은 생각을 적어놓은 책이기도 했습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내용입니다. “나쁜 놈은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어떤 놈이 나쁜 놈일까. 나는 딱 한 가지 부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나뿐인 부류다. 그러니까 나뿐인 놈이 바로 나쁜 놈이다.” 전 고민 없는 플랑크톤은 나뿐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뿐인 사람이 늘어날수록 세상에서 벌어지는 비정상적 문제들도 늘어나게 되고요. 적어도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급식 예산이 절반으로 줄어 굶는 초등학생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상관없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안철수씨가 출연한 ‘무릎팍도사’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회사를 나오면서 주식을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했습니다. 회사의 성공은 자신의 노력만이 아닌, 직원 모두의 노력이 가져온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무릎팍 도사에 나왔던 가수 비가 떠올랐습니다. 비는 피나는 노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주변의 열악한 여건도 노력으로 극복했습니다. 그는 불가능은 없다며 노력하면 모든 것은 이뤄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성공에 대한 대조적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안철수 교수가 생각하는 성공의 밑바탕엔 개인의 노력과 함께 사회 구조 같은 주변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반면 비의 성공의 토대엔 개인의 노력밖에 없습니다. 전 후자의 생각은 위험한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노력하지 않은 사람으로,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패자의 비겁한 변명으로 돌릴 수 있다는 위험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회의 성공은 안철수 교수가 말한 대로 한 개인의 역량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린 세상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세상이 부패하고 비정상적이라면, 그 세상에 얽힌 개인도 자신의 노력만으로 성공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 에디슨, 퀴리가 한국에 태어났다면 별 볼일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란 우스개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수학만 잘했기 때문에 수능점수가 낮아 대학에 못 갔을 것이고, 에디슨은 특허 절차가 워낙 복잡해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고, 퀴리는 여자라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을 것이란 내용인데요. 과장된 면이 있지만 분명 한 개인의 성공이 세상의 모양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농담입니다. 분명 ‘나’를 위해서라도 함께 잘 사는 고민은 필요해 보입니다.

우린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고민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절대 자신과 무관한 달나라가 아닙니다. 고민을 하게 되면 좀 더 시야가 넓어집니다. 더 많은 것이 보입니다. 이제 더 멀리 봐야 할 때입니다. 무수한 동료들이 해고되더라도, 그 해고 명단에 나만 없으면 괜찮다는 사고는, 언젠가 나도 동료처럼 억울하게 해고될 수도 있다는 사고로 발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변의 비정규직은 나보다 무능한 인간이 아닌, 비정상적인 사회가 만들어낸 차별받는 억울한 인간이란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현재의 조류 속에서 나와 세상에 대해서 조금 더 고민한다면 나뿐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고민을 통해, 나를 둘러싸고 있는 플랑크톤의 허물을 과감하게 벗어던지십시오. 고민이야 말로 어둠밖에 남지 않은 이 시대의 유일한 희망의 빛입니다.

책, 영화, 여행을 통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는 부지런한 블로거, ‘알스카토’입니다. (http://blog.naver.com/haine80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