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경쟁’이다. 어릴 때 친한 친구 L은 공부는 물론 그림과 붓글씨도 수준급이었던 수재였다. 그에 비하면 나는 다방면에 걸쳐 조금씩 즐기는 수준의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이런 나와 L을 어른들은 ‘경쟁 상대’로 규정짓고 모든 것을 L과 비교하려 들었다. 내 입장에서는 뱁새가 황새 쫒아가는 식의 가당치도 않은 설정이었다. 애초부터 나는 L과 경쟁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와 나는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조금씩 개인의 특성이 ‘다를’ 따름이었다. 남녀 관계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 훨씬 조화롭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다.

메이저 방송사의 뉴스나, 드라마, 오락프로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지역에서 라디오 방송을 제작하면서 나는 다른 방송사와 경쟁한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일단 각각의 방송사 색깔이 다르고 방송 시간대가 다르며 기획과 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청취자 입장에서 선택의 문제라고 본다. (물론 그 선택의 틀을 자기 방송사 채널로 고정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은 누구나 갖고 있겠지만.)

▲ ⓒ 김사은 PD
게다가 우리 방송은 후발주자로서 애초부터 경쟁상대 없이 혼자서 발에 땀나도록 뛰어야 하는 고독한 레이스를 펼쳐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외롭게 뛰고 있는 내 곁에서 누군가가 보조를 맞추며 박수를 치고 응원을 해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타 방송사의 PD들이었다. 하늘 같은 선배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응원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 분들 소속사 입장에서는 어쩌면 ‘경쟁사’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속사를 넘어 ‘방송의 본질’을 보는 혜안을 가진 분들이다.

2년 전 전주 한지를 소재로 특집 다큐멘터리를 준비할 때 섬광같은 영감을 불러일으켜 준 분은 A사의 편성제작국장이셨다. 그분은 소재를 선택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주셨다. 거기에 숨결을 불러일으킨 분은 B사의 중견 PD선배다. 구성을 전개하는데 막힌 물꼬를 열어주셨다.

C사의 후배는 작품에 대해 이런 저런 조언을 보태주었다. ‘경쟁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역 문화의 우수성을 살리고 방송을 통해 지역 방송의 발전을 기대”하는 대의적인 면에서 함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여기저기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지난 가을 개편을 앞두고 MC를 구하는 문제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내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준 사람은 D방송국의 편성제작국 간부였다. 그 분은 ‘아끼던’ 사람이라며 기꺼이 우리 방송국과 인연을 맺게 해주셨다. 아마 고명딸 시집보내는 심정이셨을 게다. 그 선배는 “방송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김PD를 믿는다”며 잘해보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용기가 났다. 달포전 방송프로그램 기획을 하면서 기획력이 뛰어난 멀리 대구의 박PD에게 급히 조언을 구했다. 생방송 준비 중이던 박PD는 그 바쁜 와중에 일일이 도움말을 주었고 생방송 중 테입돌아가는 짧은 시간에 어떻게 되었냐고 결과까지 물어왔다. 방송에 관해 칼같은 박PD로서 대단한 성의를 보여준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우리들의 관계를 누가 ‘경쟁관계’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방송. 특히 지역 방송의 현실과 발전 가능한 대안을 찾는 것에 대해서는 조건없이 자신들이 가진 정보와 노하우를 나누어주는 동지들이다. 그분들이 곁에 있어서 든든하다.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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