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늬우스 부활은 잘한 것이다.”

박정희 ‘각하’가 무덤에서 일어나 하신 말씀이 아니다. 문화부 2차관인 김대기씨가 한 말이다. 김 차관은 25일 기자간담회에서 대한늬우스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이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이어 “대한늬우스 홍보하는 사람은 역시 다르더라. 그렇게 하니까 이슈화 되는 것 아니냐. 울분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고,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도 있고, 저 사람들의 홍보기법이다”고 홍보제작사를 치켜세웠다.(노컷뉴스, 김대기 문화부 차관, “대한 늬우스 부활은 잘한 것”)

관료 특유의 느긋함이 돋보이는 상황 돌파용 노하우(열 받으면 지는 거다?)라고 해도 좋겠다. 하지만 온갖 매체와 인터넷 여론이 들끓어 오르고 있는 지금, 태연자약하게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노이즈 마케팅’을 염두에 뒀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많은 이들이 ‘머리에 ×만 찬 공무원’이라며 원색적 비난을 스스럼없이 하지만 사실 이분들, 그렇게 쉬운 분들이 아니다. 나름 공부도 할 만큼 하고 대한민국의 엘리트라는 자부심도 가질 만큼 가진 분들이다.

▲ 문화체육관광부가 공개한 ‘대한늬우스 - 4대강 살리기' ⓒ 문화체육관광부
김 차관의 발언은 대한늬우스 사건이 한순간의 헛발질이 아니라 일관된 전략 아래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란 추측을 가능케 한다. 지금, 공무원들은 조직논리에 침윤된 개인들이 어떻게 망가져 가는지를 국민들에게 몸소 보여주는 새로운 서비스를 펼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정원에서 벌이고 있다는 ‘안보신권’ 이벤트의 황당무계함을 보라. 단지 돌발적인 해프닝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당당하지 않은가.

사실, 25일 뚜껑을 연 ‘대한늬우스’는 생각만큼 스펙터클한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가족여행’, ‘목욕물’ 두 편 모두 평소 ‘대화가 필요해’ 꼭지에서 보여준 생기를 전혀 발휘하지 못한 채 어색한 분위기로 일관, ‘정부정책을 쉽고 편하게 이해시킨다’는 광고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워보인다.

오히려 각종 논란에 휘말림으로써 역풍을 우려해야 할 상황이다. 문화부는 일반광고와 마찬가지로 광고비도 지불하고 상영하는데 비판을 듣는 게 억울하단 입장. 그러나 <대한 늬우스 - 4대강 살리기>가 ‘25일부터 한 달간 전국 52개 극장 190개 상영관을 통하여 선보일 예정’이라는 걸 생각했어야 한다. 이 정도 역풍도 생각 못했으면 바보란 말을 들어도 어떻게 변호해 줄 길이 없다. 대대적인 비판이 일 것을 예감했으면서도 노이즈 마케팅을 감수하고 밀어붙였다면, 당연하게도 더 바보라 할 밖에.

일반광고와 같다, 는 논리는 얼핏 매우 정당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관객들이 언제 영화상영 전에 나오는 광고들에 대해 이만한 불평불만을 쏟아놓은 적이 있던가. 왜 우리만 갖고 그래? 자본과 정부를 차별한다는 느낌, 받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극장에서 상영되는 다른 상업광고들은 대개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홍보다. 이건 관객들이 광고를 본 후 최소한 취사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정책에 대한 일방 홍보는 선택의 자유라는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선택사항이 있다면 눈을 감거나 귀를 막거나, 극장을 나가거나 정도가 있겠다. 현명한 관객들은 야유를 날리거나 조롱을 하며 즐기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또 하나 문제는 이 광고가 국민의 세금으로 지불되고 있다는 것이다. 4대강 살리기(라고 쓰고 한반도대운하라 읽는다) 사업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은 가운데(‘4대강 살리기 종합계획 예산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67.4%), 한국사회여론연구소 6월 22일 정기 여론조사) 국민의 의사에 반해 국민의 돈으로 국민을 가르치고야 말겠다는 태도는 많은 이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것이다. 가뜩이나 한국 영화산업이 빈사상태에 허덕거리는 상황에 명색이 주무부처라는 곳에서 관객들마저 극장을 외면하게 만들겠다는 것 또한 괘씸하다. 벌써부터 극장주들이 대한늬우스 상영극장에 대한 불매운동 덕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는 소문이다.

어쩌면 유인촌 장관은 그만의 새판 짜기를 지속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학부모 세뇌 음모론’을 펼치던 그가 국민들을 ‘세뇌’하겠다고 나섰을 땐 그만한 계산이 있는 게 아닐까. 한예종에서 ‘이론수업 따윈 필요없다’고 강하게 밀어붙인 이후에 복고스타일의 대한늬우스를 들고 나온 걸 보면 문화부가 ‘키치’를 공식 전략으로 선택했다고 추측해 볼 여지가 있는 거 아닐까.

제작의도를 존중하자면 문화부는 대한늬우스 프로젝트에서 촌스러움과 의도적인 상투성을 비트는 것을 통해 키치라는 전략을 사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키치는 본래 모방으로 일관한 속된 예술, 품위 없는 저속한 스타일 등을 뜻하는 말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천박함과 촌티를 무기로 활용하는 사례가 나오기도 한다. 최근 몇 년간 각종 광고와 영화, 드라마 등에서 인기를 끌었던 복고열풍이 그렇다. 시침 뚝 떼고 촌스러움을 연기하는 거다. 여기엔 ‘좋은 취향’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에 대한 야유나 조롱의 정신이 탑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가 환기하는 ‘텅빈 충만’의 정서를 생각하면 손쉬울 거다. 키치를 무기로 작업하는 예술가의 대표격은 최정화다. 그가 초현대식 건물인 종로타워 한켠에 세워둔 <세기의 선물>은 금칠한 플래스틱으로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석탑을 재현해 놓은 ‘진짜 가짜’(이정우)다. 실제로 보면 이런 싼티-촌티가 따로 없다. 이렇게 키치를 노골적으로 표방한 예술은 그 촌스러움으로 폼잡고 무게잡는 것들을 공격한다.

그런데, 대한늬우스의 공격대상은? 국민이다.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국민들을 계도하기 위해 옴짝달싹 못하는 극장 안에서 닥치고 볼 수 있도록 국가가 직접 ‘서비스’한다는 거다. 이번 사태에서 진짜 촌스러운 건 ‘대한늬우스’라는 이름이나 스타일이 아니라 정부의 국민들에 대한 태도다. 촌티를 가장하려 하는데 액면이 촌티여서 가장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촌스러움을 가장한 이격효과가 나야 하는데, 정말이지 현실이 너무 압도적인 탓에 농담처럼 보이지 않는 거다. 한쪽에선 ‘어, 이 정도면 웃어줘야 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선 새파랗게 질리는 꼴이랄까. 개구리에게 던지는 돌에 아무리 알록달록한 색을 칠하더라도 맞으면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예쁜 돌을 던지면 좀 즐거워할 줄 알아라’, 하는데 ‘저 돌 맞으면 죽는다’라는 생각에 웃음은커녕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시는 소리에 소름이 돋는 형국이다.

그러니까 당장 돌맞아 죽게 된 이들이 가만 있을 수 있나. 그 돌 던지는 곳에는 가지 않겠다(극장 불매 운동), 돌멩이에 칠해진 그림 그린 이들의 작품은 보지 않겠다(개콘 시청 거부 운동), 돌 던진 놈들 두고보자(정책 일방홍보 비판), 그러고 보니 그 돌 우리 돈으로 산 거라면서?(세금낭비 논란), 또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돌이네?(독재 회귀 비판)란 반응들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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