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 싫은 사과를 해야하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다. 대국민담화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의 표정이 힘들어 보였던 것은 그런 이유가 컸으리라 생각한다. 마음을 열고 최대한 편견 없이 보려고 해도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는 여당이 주장하는 대로 진솔한 입장표명이라기보다는 여러 문제를 고려한 ‘퍼포먼스’에 가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하기 직전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는 사뭇 충격적이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갤럽의 주간정례조사 결과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 수행에 대한 긍정평가는 5%에 불과했다. 이는 직무수행 평가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수치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들이 이렇게 자신에게 등을 돌린 이유를 무엇이라 생각할까. 대국민담화를 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씨와의 관계에 대해 대통령이 된 이후 친인척과의 교류마저 끊은 상태에서 개인사를 도와줄 사람도 없어 도움을 받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에 대해선 “개인적 인연을 믿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에게 엄격하지 못한 결과”라고 표현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또 자기 잘못을 인정한다면서 “앞으로 사사로운 인연을 완전히 끊고 살겠다”고도 했다.

하나씩 따져보면 결국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핵심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결국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대통령이 사유화 해 최순실 씨에게 사실상 국정 전반에 대한 판단을 맡긴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이 문제를 마치 최순실 씨가 청와대에 자유롭게 드나든 게 문제라는 정도로 축소해서 사고하고 있다. 국민들이 지적하는 것은 최순실 씨가 사실상 대통령으로서의 권능을 가졌던 게 문제라는 것이지 박근혜 대통령이 사사로운 인연에서 철저하지 못했다는 점만이 아니다. 이 사건은 단지 대통령과 친한 사람이 사적 친분을 이용해 자기 배를 불렸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박근혜 대통령은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이다. 특정 개인의 전횡은 박근혜 대통령의 적극적인 협력과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 최순실 씨가 자기 이득을 위해 막후에서 기획한 이런 저런 사업들은 대개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를 지시하거나 지지하는 발언을 통해 현실적 힘을 얻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로지 최순실 씨 모녀에게 득이 되지 않는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신분이 보장된 공무원을 ‘나쁜 사람’으로 규정해 내쫓았다. 이제와서 뭐가 안타깝고 참담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이비 종교’와 ‘굿’을 콕 찝어 얘기한 것은 사실 놀라운 부분이다. 일반적인 상식에선 굳이 대통령이 직접 이런 국면에서 내놓는 대국민담화문에 넣을 필요가 없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선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들의 분노를 자신을 둘러싼 이런 저런 유언비어가 사실일 수 있다는 믿음에 의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국정농단이나 헌정거부 등의 문제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됐다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는 국민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이 상황을 여전히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의’로 행한 일들이 문제가 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억울하다”고는 말해야겠는데, 그렇게 말할 적절한 포인트를 찾기 어려웠으므로 굳이 억울하다고 말하는 게 가능한 부분을 담화문에 끼워 넣은 것 아니겠냐는 거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 사회 원로들과 간담회를 진행하면서 “내가 사교에 빠지고 굿을 했다는 얘기까지 나오더라”고 말한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제기되는 모든 의혹에 대해 약간의 해명조차 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한 걸로 알려져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4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최순실 국정개입' 의혹 파문 관련 대국민 담화를 마친 뒤 밖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추진된 일”, “미래 성장 동력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기울여 온 국정과제들까지도 모두 비리로 낙인찍히고 있는 현실”이라는 등의 표현을 동원해 자신의 ‘선의’를 강조하는 것은 유아적 현실인식에 의한 것 외 법적 문제를 고려한 결과로도 읽힌다.

최순실 씨와 공모해 기업들로부터 재단 출연을 강요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검찰 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이를 지시했고 모금 상황을 종종 보고하였다는 증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일부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7월 창조경제 관련대기업 총수들과의 오찬 회동에서 7개 기업 총수들과 따로 독대해 출연을 강요하였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결국 재단 출연금 관련 의혹에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연관돼있다는 의혹을 거부할 수 없게 된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의도’가 문제가 된다. 대기업들이 낸 돈이 박근혜 대통령이나 최순실 씨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고 권력 차원에서 이에 대한 대가가 제기되었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러나 국가 정책에 협조해달라는 차원에서 재단 출연을 압박한 것이면 직권남용 등의 경미한 혐의로 법적 책임을 따질 범위가 좁혀지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자의 효과를 위해 굳이 자신의 의도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담화문에 언론의 예상과는 달리 김병준 국무총리 후보자와 관련된 부분이 빠져있는 건 의아한 대목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국무총리에게 상당한 권한을 보장한 것을 전제로 한 담화문이며 이를 김병준 총리 후보자가 수용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야권이 요구하는 김병준 총리 후보자 지명 취소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또 김병준 총리 카드를 계속 밀어 붙임으로써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 전반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을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이 겉으로는 울먹이며 약한 모습을 보인 것 같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평소와 거의 같은 수준에서 상황을 통제하려는 의도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상황은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국회가 추천하는 총리 후보자를 재지명하고 별도특검과 국정조사를 수용하지 않으면 정권퇴진운동에 나서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도 국회의원 자격으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서명 운동에 나서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결국 5%까지 떨어진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그 이하로 내려갈 수도 있다. 이미 새누리당 일각에서는 “5%라는 것은 아무도 지지를 안 한다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자조 섞인 한탄이 흘러나오고 있다.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되게 할 것이 아니라 순리에 따르는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 외에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런 식의 대응을 계속하면 남은 1년 4개월의 임기는 오로지 혼란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시중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외교안보적 위기를 자초해 판 뒤집기를 시도할 거라는 풍문도 떠돈다. 어떤 경우든 국민이 계속 불행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권력이 더 이상 국민을 불행하게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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