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가 벗는다, 뉴스를 진행하면서 앵커가 하나씩 옷을 벗기 시작한다. 소리만 듣는다면 여느 뉴스와 다를 바 없지만 화면 속 앵커는 어느새 전라가 되어 있다. 하릴없는 밤, 턱을 괸 므흣한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전라의 앵커가 뉴스를 진행하는 네이키드 뉴스의 한국어 첫 방송을 앞두고 미디어는 “노출 수위 어디까지?”를 물으며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1999년 캐나다에서 최초로 인터넷 방송을 통해 선보였던 네이키드뉴스는 앵커가 옷을 입지 않은 채 등장하거나 뉴스를 진행하는 도중 옷을 벗는 스트립쇼 형식을 도입해 화제가 되었으며, 현재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등 다양한 언어의 뉴스를 제공하고 있다. 17일 회사 설립을 공식 발표한 네이키드 뉴스 코리아는 오는 23일 국내 론칭행사를 실시, 앵커 소개와 진행 방식 등을 알릴 계획이며, 곧 뉴스서비스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어디까지 벗을 건지, 누가 어떤 식으로 진행을 할지, 자동반사적인 이 호기심이야 보면 될 일이지만, ‘벗은 여자’와 ‘뉴스’ 사이에 놓인 우주적 거리가 단숨에 좁혀진 충격은 신문물 앞에 선 신사유랑단 같다. 그래도 성인계라면 남부럽지 않게 탐험하신 용자로서 ‘나, 촌스럽게 왜 이래, 응?’

▲ 네이키드 뉴스 코리아 홈페이지 캡처.
9시 뉴스와 네이키드 뉴스, 옷 한 벌의 가벼움

요아브 시나이 대표는 네이키드 뉴스를 일컬어 “숨김없는 대담하고 솔직한 뉴스를 추구하는 미디어로 ‘네이키드’라는 형식의 차별성뿐만 아니라 이슈에 대한 가감 없는 분석으로 뉴스 내용에 있어서도 색다른 면모를 보여줄 것”이라고 말한다. ‘네이키드 앵커’ 뉴스가 아니라 ‘네이키드 뉴스’로 ‘뉴스’라는 미디어에 방점을 찍었다.

다른 언어권에서 방송중인 네이키드 뉴스의 샘플영상으로 짐작하자면, 이 서비스는 뉴스콘텐츠와 섹스콘텐츠를 동시에 제공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뉴스의 형식을 그대로 차용하되 단 하나, 앵커가 입은 옷을 벗김으로써 극단적으로 기존의 뉴스와 차별화된다. 결국 일반 뉴스와 네이키드 뉴스와의 차이는 앵커가 입은 옷 한 벌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하지만 그 사소한 차이가 네이키드 뉴스를 뉴스콘텐츠가 아니라 섹스콘텐츠로 만들어버린다. 이 뉴스를 보기 위해 기꺼이 성인인증을 거치고 유료결제를 할 시청자는 섹스콘텐츠를 소비하려는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다. 아무리 네이키드 뉴스가 뉴스콘텐츠에 저널리즘적 고민을 투영시킨다하더라도, 내용적으로 아무리 대담하고 솔직한 뉴스를 추구하더라도 일차적으로 섹스콘텐츠를 소비하려는 이들을 대상으로 섹스콘텐츠를 ‘판매’하는 것이다. 네이키드 뉴스는 야동의 새로운 실험이지 뉴스의 새로운 실험이 아니다.

‘앵커’ 이미지 플레이는 불편한가?

섹스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비어있는 기호다. 그래서 성적인 기호들은 한 사회의, 개인의 억압과 검열이 작동하는 구조를 ‘욕망과 금기’라는 프레임를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내주고는 한다. 가령 배설물 페티시는 그것을 금기하는, 배설물을 혐오하는 사회의 무의식적 구조를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설물 페티시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될 수는 없다. (물론, 당신의 사랑스러운 파트너가 그런 패티시를 가진다면 당신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성과 관련된 ‘욕망과 금기’라는 억압의 프레임은 현대 자본주의의 ‘시장’안에서는 깃발 들고 거리로 나서지 않아도, 단지 돈을 지불하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해방될 수 있다. 그 곳에서는 당신의 모든 취향이 존중받고 충족될 수 있다, 물론 ‘돈만 낸다면’. 그렇게 자유를 획득한 성은 그 텅빈 기호를 계속 소비시키기 위해 다른 욕망과 만나야만 한다. 체위교육이라면 모를까, 여자와 남자가 섹스하는 장면만 계속 반복된다면 동물의 왕국이나 야동이나. 그래서 섹스콘텐츠는 사회의 다양한 성적 판타지를 포획하고 그 판타지를 상상적으로 충족시켜줄 수 있는 콘텐츠를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일본의 유명한 섹스비즈니스 중에 ‘이메쿠라’라는 것이 있다. 일명 이미지 클럽으로, 돈을 지불하면 파트너가 원하는 역할이나 상황을 설정해서 섹스를 할 수 있는 이미지 플레이 섹스 숍을 말한다. 여고생과의 섹스를 즐기는 것과 여고생의 이미지를 성적으로 즐기는 것은 다르다. 실재는 언제나 판타지를 배반하는 법, 정말로 그 기호를 즐기는 데 쾌락이 있다면 상상의 플레이가 가장 이상적이다. 짝사랑이 실재적인 연애보다 더 사랑의 기호로 충만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네이키드 뉴스가 판매하는 것은 뉴스가 아니라 ‘여고생’처럼 ‘앵커’라는 상상의 이미지 플레이다. 아쉽게도 이성애자인 여성으로서는 그 이미지 플레이가 뉴스콘텐츠라는 막대한 부대비용을 들일 만큼 해피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워 이 사업의 성패를 점칠 수는 없다. 하지만 섹스콘텐츠가 포획한 사회적 욕망들은 적어도 그 장 안에서 우리를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케 만든다는 것은 안다. 끊임없이 욕망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핍된 실재를 사는 우리가 무슨 도인이라고 독야청청하겠나, 그 욕망을 인정하고 상상적인 기호로 가볍게 즐김으로써 오히려 그 구조가 투명해질 수 있다. 그것이 어쩌면 네이키드일지도 모른다. 앵커를 성적인 대상으로 취급한다고 뭐, 발끈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남성들의 이상형 1순위 앵커는 괜찮고 성적인 판타지 1순위 앵커는 불편한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네이키드 뉴스, 봉춤 춘다고 국가보안법 위반 못하란 법은 없다

아직 첫 방송도 되지 않은 네이키드 뉴스의 한국 론칭이 흥미로운 지점은, 그 등장만으로 우리에게 “왜 벗은 앵커가 뉴스를 진행하면 안 되는가?”라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답 속에 저널리즘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적 환상이 있는 셈이다. 섹스콘텐츠와 뉴스콘텐츠 사이의 위계를, ‘스트립걸’과 ‘내 이상형인 앵커’ 사이의 경계를 흔들어댄다. 그리고 그 모든 논란과 상관없이 네이키드 뉴스는 시청자들의 결제버튼을 클릭시키기 위해서만 노력할 것이다.

섹스콘텐츠의 강점은 ‘개그는 개그일 뿐’과 마찬가지로 ‘섹스콘텐츠는 섹스콘텐츠일 뿐’이라는 자유로움에 있다. 그 자유를 한껏 누리길 바란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라는 설정만으로 이미지 플레이는 충분하니까 기존 뉴스의 자기검열까지 모방하진 말고 마음껏 내지르시라. 우리는 그 속에서 ‘알아서’ 뉴스를 발견하겠다. 어차피 이도저도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장, 까짓것 국가보안법 위반 같은 혐의를 받는 섹스콘텐츠가 더 섹시하지 않나? 아, 그러면 검찰도 방송통신심의 위원들도 성인인증하고 유료결제하고 매일 모니터링해야 하는 건가? 나는 어지간한 화제가 없는 한 볼 일이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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