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두 여자와 그 수족들이 벌인 막장 드라마에 나라가 휘청거린다. 사람들 마음속에 분노만 이는 것이 아니다. 이게 나라인가 싶은 허탈감, 저런 대통령의 통치를 받았다는 모멸감, 이웃나라의 시선에서 도망가고 싶은 부끄러움, 저런 대통령을 뽑았다는 자괴감, 온갖 색깔의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그래도 우리 국민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마음 굳게 잡숴야 한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최순실이 귀국했다. 대통령측과 사전조율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우세하다. 새누리당은 거국중립내각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사태 초기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하던 청와대와 여권이 전열을 정비하고 발 빠른 행보를 하고 있다.

이제 야권 차례다. 민주당은 새누리당의 거국중립내각 주장에 대해 “청와대의 은폐 시도에 맞서 진실을 규명하는 게 우선”이라며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걷어찼다.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도 “거국중립내각과 책임총리제 논의는 (아직) 얘기할 필요가 없다. 최순실의 귀국 배경을 밝히는 등 진실 규명이 먼저”라 강조했다.

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30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긴급 최고위원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두 야당이 거국중립내각을 공식당론으로 채택했던 것은 아니지만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손학규 등 야권의 유력 정치인들이 모두 제안했다. 그리고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정의당과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대통령 하야 입장을 취했던 것도 아니었다. 우상호 민주당 원내대표가 "우린 정의당과 다르다"고 명토박듯이 밝혔고, 시민사회가 야당의 미온적 태도를 비판할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새누리당이 거국중립내각 주장을 내놓자 이를 반대하거나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국민들 눈에는 입장을 바꾼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두 야당의 냉랭한 태도는 말한 것처럼 '진실규명이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국정실패의 책임을 나눠지기 싫어서일 수 있고, 사태수습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하나같이 단견이다.

첫째, 진실규명은 시간이 걸린다. 어차피 검찰 조사가 국민들의 의혹을 풀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고, 대통령을 포함한 전방위적 수사가 가능하려면 별도의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 그 단계에 이르도록 박 대통령에게 계속 국정을 맡겨두자는 말인가? 지금 국민들의 암묵적 합의는 하야를 하든 2선 후퇴를 하든 하루라도 빨리 대통령이 국정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지 않고 대통령이 하야하면 황교안 총리가 권한대행이 된다. 거국중립내각 구성이 늦어질수록 실질적 국정공백은 길어지고, 국가적 위기는 증폭된다. 진실규명과 거국중립내각이 선후관계일 이유가 없다.

둘째, 국정실패의 책임을 나눠지는 것을 피하자는 것은 나라의 안위보다 정치적 유불리를 먼저 따지는 지극히 정략적 태도다. 국민들이 좋게 볼 리 없다. 거국중립내각이 아니라면 국정원 등에 의한 불법선거개입에 대선패배의 가장 큰 원인인 것처럼 주장하던 말들은 어뗳게 주어담을 것인가? 그 뿐이 아니다. 경제, 남북관계, 국정교과서 등 박근혜 정부가 망가뜨린 국정현안들을 바로 잡는 것은 다음 대선을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시급한 일이다. 나아가 개헌 등을 통해 권력의 사유화와 그에 따른 비선권력의 국정농단에 너무도 취약한 권력구조와 국가운영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도 필요하다.

셋째, 거국중립내각에 여야가 합의하고 대통령이 받아들인다고 주도권이 넘어갈 리 만무하다. 거국중립내각을 야권이 먼저 제안했다는 것을 대부분의 국민들이 알고 있다. 바둑에서 상대방의 응수타진을 억지로 피하려다가 ‘덜컥수’를 두면 이기기 어렵다. 야권이 먼저 제안했고 여권이 받았으면 야권은 거기에 맞는 수를 두는 것이 순리다.

시민사회가 하야를 주장하는 것은 십분 이해할 만하다. 국민들의 분노는 말할 것도 없다. CBS가 리얼미터에 의뢰한 조사에서 대통령이 책임지는 방식에 대해 '하야 또는 탄핵해야 한다'는 의견이 42.3%로 가장 높다. 그러나 시민사회에 자신의 몫이 있듯이 제도 정치권에도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 정치적 계산을 할 때가 아니라는 일부 주장도 있지만 정치적 계산을 하지 않는 정치인은 무책임한 포퓰리스트다. 시민사회의 하야 요구가 정당하듯이 정치권의 계산은 의무다. 앞으로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한 수사가 지지부진해지고, 여야가 거국중립내각 구성에 합의하고 대통령의 2선 후퇴를 요구해도 대통령이 이를 거부한다면 제도 정치권이 더 이상 국민들의 하야 요구를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오지 말란 법이 없다. 그때를 위해 치밀하게 비상계획(contingency plans)을 세워야 한다.

해방정국의 걸출한 정치가 몽양 여운형은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의 치안권 인수제안을 수락한다. 일본인의 무사귀환 보장이라는 조건도 그렇고, 총독부와 협력을 했다는 이유로 후일 적지 않은 논란이 일었다. 일설에는 총독부가 고하 송진우에게 먼저 제안을 했는데 거절하는 바람에 몽양에게 대신 제안했다고 한다. 몽양도 그런 논란을 어느 정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몽양은 치안공백을 막고 질서 있게 건국을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뛰어난 독립운동가였지만 해방정국에서 이미 정치가다운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작금의 비상시국을 돌파하려면 몽양의 지혜가 다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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