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사협의회를 통해서 알려진 사내 연봉계약직 420여명에 대한 회사의 방침이 큰 파문을 낳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비정규보호법의 적용 시점을 맞아 KBS는 법의 기본 취지인 ‘2년 이상 근로시 정규직으로의 전환의무’를 피하고자 계약해지와 자회사 이관을 7월1일부터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들리는 바로는 고령자보호법과 특수전문직 조항에 따라 법적용에서 배제되는 30명에 대해서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고 특수영상 및 수신서비스, 영상편집, 시설관리 등에 종사하는 120명에 대해서는 자회사 이관, 나머지 270여명은 계약해지할 방침이라 한다.

▲ 서울 여의도 KBS 본사 사옥 ⓒ미디어스
이러한 방침이 회사의 의지대로 시행된다면 짧게는 4~5년, 길게는 십수년 이상을 KBS에서 근무한 이들 중 다수는 졸지에 일터에서 쫓겨나 생존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한 가정의 해체로까지 이어질 사회적 타살행위가 아닐 수 없다. 또 이로 인한 사회적 파문은 KBS가 감당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 부메랑처럼 KBS에 꽂히게 될 것이다.

KBS의 한 구성원으로서 임금과 신분상의 차별을 감내하며 살아온 이들에게 차별시정은커녕 해고라는 극약처방을 강행하고서도 KBS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공익적 방송매체로서 존속할 수 있을까? 사지에 내몰린 한솥밥 동료들을 방관한 대가로 정규직 사원들은 무사할 수 있을까?

법정신에 따라, 아니 사람사는 기본 도리에 따라 비정규직 사원들은 최소한 무기계약직으로의 전환을 통해 고용을 보장해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법이 문제인가? 법은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고 2년 이상 근로시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의무화하고 있다. 법대로 하면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경영악화가 문제인가? 이들은 없어도 그만인 여분의 인력이 아니다. 특수영상, 수신서비스, 영상편집, 조명, CG, MD, 시청자서비스, 시설관리, 안전관리 등 KBS 요소요소에서 정규직 못지않은 전문성과 숙련도로 방송의 일익을 담당해온 필수요원들이다.

자회사 이관이나 파견직으로의 대체 근로를 통해서 1인당 평균 연봉 500만원씩을 절감한다고 해도 연간 20억원, 무기계약 전환시 추가되는 각종 복지비용까지 감안해도 절감되는 비용은 최대 30억~40억원에 불과하다. KBS 총예산의 0.3%에 해당하는 경비절감을 위해 공적 언론기관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팽개치고 저임금에 눈먼 악덕 자본주들의 행태를 답습하겠다는 것인가?

정녕 이해할 수 없다. 0.3%의 예산절감을 위해 KBS가 치러야 할 대가는 막대하다. 숙련된 인력의 공백으로 인한 방송의 품질저하는 새삼 들먹이지 않겠다. 정규직들은 손끝하나 건드리지 않고 가장 힘없고 서러운 계약직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일삼는 KBS를 국민들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배부른 철밥통들이 지들 살기 위해 비정규직 약자들을 사지에 내몬 KBS는 정말 나쁜 사람들이다’ ‘방송도 꼴같지 않은 주제에 인간마저 망종이다’ ‘저런 자들에게 수신료 인상이 가당키나 한가’ 등의 빗발칠 여론의 질책이 두렵지 아니한가?

더군다나 KBS가 매달 특집으로 심혈을 쏟고 있는 “연중기획 일자리가 희망입니다 - 특별생방송 함께 일하는 대한민국”을 통해서 ‘2009년 한해, KBS가 일자리 만들기에 앞장선다’는 메시지를 본 시청자들은 겉다르고 속다른 양두구육의 KBS에 대한 깊은 불신을 더욱 키울 것이다. 이는 신뢰가 생명인 공영방송 KBS에 대한 시청자의 정서적 근간을 뿌리째 흔드는 일이 될 것이다. 0.3%의 예산 절감을 위해 KBS의 기본토대를 허무는 교각살우의 조치를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정규직들이 이번 사태에 내 일 같이 함께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평생 살아남은 자의 비굴함과 죄책감을 멍에처럼 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옆에 동료가 죽어나가는데도 손 한번 잡아주지 못한 몰인간성을 내면화한 채, 사람의 기본 도리를 다하지 못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할 우리의 미래가 두렵지 아니한가?

또한 비정규직의 학살은 가까운 시일 내에 도미노가 되어 정규직에게도 다가올 것이다. 그때 가선 무슨 명분으로 사측과 대항할 수 있으며 무슨 낯짝으로 국민들에게 힘이 되어 달라고 호소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조금씩 기득권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고통분담을 통해 같이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된 도리이자 나 자신이 사는 길이다.

비정규직 당사자분들께도 주제넘게 한 말씀드린다. 옛말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다. 당사자들로부터 힘이 모아져야 한다. 힘은 모여야 생긴다. 결사의 자유, 노조결성의 자유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법에 명시된 권리이자 스스로의 자구책이다. 노조가 어려우면 협의체라도 구성하여 스스로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집단적 대응에 나서야 한다.

노동조합도 이번 사태가 조합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일로 치부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해서는 안될 것이다. 노동조합의 기본정신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정신이다. KBS 울타리 내에서 벌어지는 동료직원들에 대한 부당해고에 대해서 방관만 한다면 노동조합의 간판을 내려야 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단체행동을 통해서라도 사측의 부당함을 시정할 수 있도록 조합원의 총의를 모으는 일에 즉각 나서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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