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보도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이 거센 가운데 사측 간부·임원들에 대한 KBS 기자, PD들의 불신임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현재 사측은 “불신임 투표는 사규상 성실 의무 위반과 품위 유지 의무 위반에 해당된다”며 투표 주동자들에 대한 징계를 시사한 상황이다.

‘성실 의무 위반’과 ‘품위 유지 의무 위반’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 아닌가? 국방부의 ‘불온도서’ 지정에 헌법소원을 제기한 군법무관들에게 ‘파면’이라는 최고 중징계를 내린 근거가 바로 성실 의무 위반, 품위 유지 의무 위반이었다. 군법무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헌법소원을 제기할 권리는 이들에게 부여되지 않았다. ‘성실’과 ‘품위’의 이름으로.

▲ 한 KBS 카메라 기자가 레인커버를 카메라에 씌우고 취재를 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교육청이 일제고사와 관련해 교사 7명을 파면·해임한 근거 역시 성실 의무 위반, 복종 의무 위반, 품위 유지 위반이었다. ‘조무래기 교사 주제에 감히 교육청의 방침에 대들어?’…. 교육청 입장에서는 ‘괘씸한 것들’에게 톡톡히 맛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성실’하고 ‘품위’ 있게 말이다.

KBS 사측 역시 마찬가지다. 국으로 일이나 할 일이지 보도본부장이 정부를 비판하는 조문객의 인터뷰를 빼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폭로를 한 것으로 모자라 김종율 보도본부장과 고대영 보도국장에 대해 불신임 투표를 진행한 KBS기자협회가 곱게 보일 리 만무하며, 최종을 편성본부장, 조대현 TV제작본부장, 고성균 라디오본부장에 대해 불신임 투표를 진행한 KBS PD협회 역시 똑같은 부류로 보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권력의 의중’이 현실적으로 더 무서운 것이고, 시민들의 목소리는 그보다 한참 아래에 위치해있는 듯하다. 방송법에 명시된, “공정하고 건전한 방송문화를 정착시키고 국내외 방송을 효율적으로 실시하기 위한 국가기간방송” 경영진으로서의 책무는 어디 갔을까? “방송의 목적과 공적 책임,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을 실현하여야”하며 “시청자의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방송프로그램·방송서비스 및 방송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여야 한다”하는 KBS의 공적 책임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가?

간부와 임원들에 대한 불신임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온 상황에서 과연 내부 업무가 제대로 될지도 의문이다. KBS기자협회가 8일부터 9일까지 김종율 보도본부장과 고대영 보도국장에 대한 신임투표를 진행한 결과 불신임 비율이 각각 82.1%, 93.4%인 것으로 나타났다. 기자협회 소속 550여명 가운데 보도국 소속 기자들은 260여명에 이르며, 보도본부장 투표의 경우 219명, 보도국장 투표에는 138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이번 사태에 대한 일선 기자들의 반발이 단기적으로 억누른다고 해서 없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병순 사장 체제 이후 KBS 프로그램의 정치적 중립성과 제작 자율성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이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KBS기자협회 방송모니터단은 4일 KBS기자협회보 2면 <매맞는 KBS, 민심을 잃다>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한 뉴스 모니터 보고서를 발표하며 내부 자정 활동을 지속해나가고 있다. 모니터단은 보고서에서 “정권의 눈치를 살피는 뉴스 편집과 개별 아이템의 경쟁력 저하, 취재 의욕 상실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KBS뉴스는 이번 서거 국면에서 크나큰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보도는 두고두고 KBS 뉴스의 부끄러운 과거로 남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4~5일, KBS PD협회는 최종을 편성본부장, 조대현 TV제작본부장, 고성균 라디오본부장에 대해 불신임 투표를 진행했다. 820여명의 PD가운데 550여명이 투표한 결과, 불신임 비율이 각각 90.8%, 74%, 78%에 이르렀단다. 이에 대해 PD협회는 “이병순 사장 10개월에 대한 냉정한 평가”라며 사측에 대해 △이병순 사장의 대시청자 사과 △책임자 엄중 문책을 촉구하며,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이병순 퇴진운동’을 비롯한 강력한 저항에 돌입하겠다고 경고했다.

PD협회가 투표에 앞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91.9%가 노무현 서거 보도에 시민들의 비난이 쏟아지는 사태에 대한 책임은 경영진에게 있으며, 86.9%는 이병순 사장이 국민과 시청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기자, PD 조합원 등이 폭로한 내용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소재를 가리겠다”며 지난 1일 공방위를 진행한 바 있는 노조는 이후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는 상태다.

불신임 투표를 받은 간부, 임원들이 모두 이병순 사장 취임 이후 임명된 이들이라는 점에서 기자·PD협회의 불신임 결과는 사실상 ‘이병순 체제’에 대한 불신임으로 해석되고 있다. 사측의 ‘투표 주동자’ 징계 시사에 PD협회 등은 “징계 강행시 정면으로 맞서겠다”고 밝혀, ‘경영진 VS 기자·PD’ 대결구도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김비서’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KBS 경영진은 한번쯤 자신들의 재원중 40%가량을 차지하는 수신료가 어느 주머니에서 나오는지,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대로 가다가는 달마다 나가는 전기요금 고지서에 적힌 ‘수신료 2500원’을 보며 울분을 삼킬 시청자가 계속 늘어날 테니 말이다. 울분이 커지면 그 다음은 행동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