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부가 PSI에 참여한다고 공표했을 때, 그 분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욕먹을 각오가 되어있다던 그 분, 작가 황석영이다.

오빠가 돌아왔다. 세간의 숱한 변절논란에 이은 정부의 전격적인 PSI 참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의 반등을 타고 슬그머니 돌아왔다. 아니, 사실 ‘돌아왔다’는 표현은 맞춤한 말이 아니다. 그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변절논란’이 탐탁지 않았던 것은 수위의 높낮이 차원이 아니라 그 말이 핵심을 비껴나갔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이명박과 중앙아시아의 초원을 누비기 전에도, ‘잠 못 이루는 번민의 나날’이 계속될 정도로 욕을 먹고 한겨레 ‘왜냐면’을 통해 입장을 밝힌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왜냐면’에 글을 쓴 것이 사회적 물의를 빚은 데 대한 ‘겸손’의 표현인지, 한겨레가 그를 홀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후자일 경우, ‘국민작가의 굴욕’이라 할 만하다.)

▲ 한겨레 6월8일자 <왜냐면>에 실린 황석영 작가의 기고
황석영의 이번 행보에 대한 입장들도 각양각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러면 그렇지 황석영이 우리를 실망시킬 리 없어’라며 안심하는 이들이 있는 한편, 오락가락 행보를 노벨상이나 권력을 향한 욕망과 결부된 노망 또는 치매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다.

황석영의 이번 행보는 두 가지 원인으로 분석해 볼 수 있다. 빈약한 상상력과 오도된 소명의식이 그것이다. <장길산>의 작가에게 상상력을 논하다니 간도 크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사실이니까. ‘어른’에게 비뚤어졌다는 말을 함부로 쓰다니 버릇없다 해도 상관없다. 비뚤어진 걸 비뚤어졌다고 이야기하는 되바라진 ‘아이’들이 늘어날수록 사회는 명랑해질 테니까.

그는 이명박 정권을 중도실용이라 했다. 중도, 맞다. 한국의 이데올로기 지형에서는 이명박 정도만 되도 중도라 할 만한 구석이 있다. (이 지점에서 지난번 중앙아시아 순방 이후 복거일이 ‘이문열을 데려갔어야지 왜 황석영을 데려갔는가’라고 반문한 것은 보수의 유니크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가 이야기했던 좌파의 경직성도 충분히 수긍할 만한 바가 없지 않았다. 허나, 실용은 이념이 아니라 행위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 아녔던가? 이명박 정권이 실용적으로 자신의 중도를 확인한 바가 없는 상황, 오히려 이념적 경직성만 드러내는 상황에서 그와 같은 규정은 상상력의 빈약이나 과잉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번에 그가 이야기한 ‘중도실용은 슬로건에 그쳤다’라는 말은 한 달 전에 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대체 한 달만에 정부의 성격이 180도 돌변할 이유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사실, 이것도 그가 ‘변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의 ‘말 바꾸기’가 새삼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 몽골의 광활한 땅을 남북이 함께 개발하자고 했을 때 황석영은 그로 인한 ‘성장동력’과 개발의 열매를 상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쩔 것인가. 내 눈에는 그것이 ‘몽골에 대운하를 파자’는 말과 한 치도 다를 게 없는 것을. 작가가 일국적 상상력에 갇혀있어선 안 된다 말씀하시던 그 자신의 상상력은 우리 민족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몽골의 자연을 탐욕스레 헤집어놓자는 제국주의적 욕망에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북한을 내부식민지 삼으려는 자본주의의 날름거리는 혓바닥이 부담스러워 당분간 새로운 ‘먹거리’로 ‘우리 민족’의 고통을 덜어보잔 얘긴가? 그 상상력, 참으로 호방하다. 헌데, 어째서 그는 그 개발로 인해 몽골의 자연이 신음하는 소리와 자연을 기반으로 살아가던 몽골인들이 도시빈민으로 피폐해진 생을 영위하는 아픔은 상상하지 못하는가? 아니, 설마 그가 이 정도도 떠올리지 못할 만큼 빈약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결국, 남는 것은 하나다. 그는 일부러 이것을 묵인한 것이다. 전자라면 대작가에 걸맞지 않는 초라한 상상력이 부끄러워지고, 후자라면 민족을 위해 타자를 착취하겠다는 파렴치함이 부끄러워진다.

그는 이런 ‘제국주의론’에 대해 ‘지당도사 같은 말씀’이라고 일축한다. 그런데 그 근거로 드는 말이 ‘지난 정부 때에 동몽골 개발을 위한 합의문서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거다. 사실, 몽골-코리아연합 구상은 지난 정부에서 심심치 않게 제기되었던 정책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지난 정부에서 합의한 바가 있으면 그것만으로 제국주의의 혐의를 벗을 수 있는가? 아무리 잘 봐줘도 이는 노무현의 죽음에서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말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다음, 오도된 소명의식. 그는 ‘왜냐면’에 실린 글에서 “뭔가 관계 개선을 위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던 것이 사실”이라고 고백했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겠다. 바로 이거다. 나 아니면 안 된다, 는 오도된 소명의식. 내가 이 국면에서 나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과잉된 자기책임감. 어찌 보면 이것은 전형적인 ‘꼰대’들의 인식구조다. 나는 이미 다 경험해 본 것이고 내가 다 알고 있으니 너희들을 위해 몸소 나서 일이 되게 만들겠다는 오만과 편견. 그는 지난 대선에서도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기 위해 총대를 메겠다’며 정치권을 들쑤시고 다녀 결국 손학규를 한나라당에서 탈당하도록 부추겼다. 결과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중도’를 표방했던 손학규는 예선통과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았고, 황석영은 새로운 중도의 모델로 이명박을 골랐다가 다시 돌아섰다. 누군가는 이를 ‘삼국지 증후군’이라 표현했다. 군주나 책사, 명장이 되어 세상을 휘젓는 판타지를 실제 현실에서 구현하려다 보니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듯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고 나온 것은 자신의 강박증을 이명박을 이용해서라도 시원하게 해소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는 자기고백에 불과한 것이다. 초라한 상상력과 엇나간 소명의식이 빚어낸 것은 세상의 조롱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었을 뿐, 현실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목적의 실현을 위해 수단을 적절히 배치하는 것을 두고 기획이라고 한다. 황석영의 이번 기획은 실패한 기획이었고, 실패의 원인은 대작가라 하기에는 부족한 상상력(혹은 MB에 대한 과도한 상상력)과 내가 이 민족을 위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뚤어진 소명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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