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신체의 재현

1957년 에른스트 칸토로비치(Ernst Kantorowicz)는 <왕의 두 신체(The King’s Two Bodies)>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왕이 자연적 신체(body natural)와 정치적 신체(body politic)라는 두 가지 신체를 가진다고 말한다. 자연적 신체는 온갖 결함과 노화를 겪고 시간이 흐른 후에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신체인 반면, 정치적 신체는 ‘정치형태와 정부를 구성하는, 보이거나 조정될 수 없는 신체’이다. 정치적 신체는 자연인으로서 왕의 신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무능력에 의해서도 좌절되거나 무가치해질 수 없다. 정치적 신체는 자연적 신체를 부인함으로써 자신을 성립시킨다. 때문에 정치적 신체는 물리적 현존(presentation)이 아니라 재현(representation)된 이미지에 의존한다. 노무현의 죽음 역시 같은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그의 죽음은 개인의 물리적 죽음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 죽음이다. 그는 죽음 이후에 재현된 이미지를 통해 정치적 신체를 제공받아 사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죽음 이후에 부여된 그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하나는 탈정치화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현정권의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이미지이다. 어딘가에서 노무현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이 보도된 이후 인터넷과 신문, 티비, 라디오 등 온갖 매체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애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에게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언론뿐 아니라 시민들도 여러 경로를 통해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신체에서 정치성을 탈각시키기 위해 노력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간미 넘치는 서민의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었다. 밀집모자를 쓴 그의 사진은 ‘정치인답지 않은 소탈함’, ‘파격적인 탈권위주의’, 가난한 사람을 위해 힘썼던 가난한 이의 대통령, ‘서민 대통령’을 대리 표상하고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의 모습ⓒ민중의 소리
다른 한편으로 노무현은 정치적 희생양의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그는 부자 대통령 이명박의 정치에 조롱당한 ‘바보 노무현’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타살당한 저질 정치의 희생양인 것이다. 여기서 노무현은 마치 타락한 현대 정치의 모든 원죄를 짊어지고 죽은 성자처럼 재현된다. 탈권위적 소탈함을 지닌 서민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는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지저분한 정치와 대비를 이루며 희생의 숭고함을 부각시킨다. 그의 죽음 이후 지속되고 있는 애도와 추모는 마치 종교 의례와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그의 죽음 이후 재현된 이미지가 종교적 색채를 띄고 있는 것과 관계된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타락한 정치적 상황이라는 맥락,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배자의 가혹한 박해 그리고 그들의 고난, 온갖 고난 이후의 죽음, 죽음 이후의 삶. 이것들이 노무현의 죽음을 종교적으로 만드는 요소들이다. 사람들이 남긴 애도의 글 속에서 발견되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현실정치에 대한 혐오와 자기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고백이다. 희생된 노무현의 죽음이 종교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이런 타락과 무력함에 애도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점 때문이다. 마치 그리스도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음으로써 타락한 ‘우리’의 죄를 사하고 구원했듯이 말이다. 적절하게도 노무현을 추도하는 어느 한 광고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당신은 우리의 책임 회피를 죽음으로 모조리 용서하셨다. 우리는 당신을 애도하며 다시금 종에서 주인이 되었다.”(경향신문 5월 26일, 전대협동우회)


희생적 죽음의 정치적 효과

희생적 죽음은 강렬한 심리적 효과를 가진다. 희생적 죽음은 정치의 타락을 방조한-살아 남은-사람들에게 심리적 고통과 부채를 남기고,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래를 위한 계획의 지평을 열어 놓는다. 그것은 현재의 원인이며 미래로의 지향을 남긴다. 부채와 고통을 공유하는 이들은 상상적인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미래로의 지향은 이 ‘상상의 공동체’의 몫이 된다. 이 ‘상상의 공동체’는 외적으로는 확고한 경계를 가진 듯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상당히 허술하다. 공동체가 내적인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는 정례화된 의례의 역사적 축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의 허술한 기반 -신화화된 정치적 초상- 에 기대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민주당의 노력은 그래서 빈약해 보인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급속히 올라간 민주당의 지지율은 그 기반 만큼이나 허술한 것이다. 한나라당의 경우는 상당히 다르다. 그들은 이 ‘상상의 공동체’의 ‘우리’ 속에 포함되지 못하고 있다. 혹은 ‘우리’의 경계 자체가 한나라당에 대한 정치적 반감으로 형성된 것이기까지 하다. 한나라당은 ‘우리’의 외부에 있음에도 그 내부를 지향하는 포즈를 취한다. 그들이 취하는 포즈는 바로 화해와 통합이라는 정치적 수사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와 ‘그들’을 화해시키고 통합함으로써 자신들을 향한 적대성을 제거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나거나, 오히려 적대를 강화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화해와 통합에서 ‘쇄신’으로 국면 전환을 꾀하게 된다.)

노무현의 죽음을 추모하는 이들과 민주당 그리고 한나라당은 대립구도 속에 있지만, 그 대립항에 기대어서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를 포함하는 구조를 이룬다. 그들은 서로 포함인 배제이며, 배제인 포함 관계에 있다. 문제는 서로를 포함하는 이러한 ‘상상의 공동체’에 배제의 형식으로조차 포함되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전 대통령의 서거와 그 이후의 추도 정국 때문에 언론과 정치에서 잠시 밀려난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밀려나 있는 존재들이다.

▲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가 진행된 서울광장의 모습ⓒ나난
노무현은 죽음 이후 (그 자신조차도 거부했던) 국민적 영웅으로 재탄생한 반면, 그들은 살아 있을 때조차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그를 추모하는 이들이 상상적 공동체를 형성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칠 때에도 그들은 이름 없는 존재들이었다. 국가 폭력에 의해 살해당한 후 아직까지 장례도 못치르고 있는 용산의 철거민들, 유서에 자신의 상처만을 언급했던 노무현과 달리 노동자 민중의 고통을 유서에 남기고 죽어간 박종태, 추모객들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주권의 주체인 국민으로 호명하는 순간 배제되어 버린 이주 노동자들, 시청에 모여 국민장을 치를 때조차 그곳까지 찾아갈 접근권을 박탈당한 장애인들. 그 열렬한 추도 행렬에서 이 모든 이들의 존재가 망각되어 있었다. 그들은 ‘온 국민’이 슬퍼하고, ‘우리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노무현의 죽음 뒤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온 국민’에도 ‘우리 모두’에도 속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화화된 정치적 초상을 등에 업은 ‘우리’들이 ‘밀려나 있는 존재들’을 서술할 어떠한 언어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추도는 자연적 신체가 아닌 정치적 신체에 대한 추도였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던 것도 MB정권의 정치적, 경제적 실정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신체에 투사된 것이었다. 그에 대한 추도가 탈정치적 이미지를 통해 재현될 때조차 그것은 강한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추모 열기 속에서 나타난 정치적 냉소는 MB정권을 향한 것이었지만, 그것의 효과는 ‘밀려나 있는 존재’들과의 소통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노무현을 추모하는 ‘우리’는 그 ‘존재들’과 소통을 포기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번역할 언어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저항도, 체계적인 담론이나 논쟁도 형성되지 못한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언어란 어딘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들을 통해 우리는 발언하고 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냉소가 아니라 소통과 연대이다. 정치적 개입이란 하나의 사안에 매몰되어 그것을 해결하고 난 후에 다른 것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위기는 언제나 총체적인 것이며 하나의 문제는 다른 문제들과 구조적으로 얽혀 있다. 이것이 지금 소통과 연대가 필요한 이유이다.

내 꿈은 한량이다. 하지만 일단은 먹고 살아야 되는지라 문화사회연구소라는 곳에서 일도 하고, 공부라는 것도 하고 있다. 그래도 꿈이 한량인만큼 너무 열심히 하지 않으려고 노력중이다. 요컨대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알지 않기 위해 노력중이라는 거다. 이 우주가 무엇을 위해 있고, 또 왜 이곳에 있는지를 누군가가 정확하게 알아낸다면, 그 순간 이 우주는 당장 사라져버리고 그 대신 더욱 기괴하고 더욱 설명 불가능한 우주로 대체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이미 벌어졌다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이론도 있다. 나는 그 이론을 믿는다. 나 때문에 세상이 더 복잡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지 않는다.) 이미 세상은 상식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복잡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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