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소문으로 떠돌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확인돼 충격을 주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강조한 문화 융성은 '정치검열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한겨레>에 따르면 10일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지난해 5월 29일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회의록에서, 권영빈 당시 예술위원장은 "책임 심의위원을 선정해놓고 보니 여러 문제 중 지원해줄 수 없도록 판단되는 리스트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을 안진다"고 말했다. 이어 "또 하나는 참 말씀드리기가 힘든데요. 심의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게 돼 있다. 그런 점에서 자율적 심의가 원만하지 않다"고 밝혔다. 예술계 지원에 대한 심의를 예술위 자율적으로 할 수 없으며, 마치 지원이 금지된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뉘앙스의 발언이다.

권영빈 위원장은 "우리 예술위원들이 추천해서 책임심의위원들을 선정하면 해당 기관에서 그분들에 대한 신상 파악 등을 해서, '된다, 안 된다'는 얘기가 나온다"며 "그래서 그 과정에서 탈락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예술계에 대한 지원을 예술위 외부에서 결정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1월 문화예술인 신년인사회 행사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12일 <한국일보>는 기사 '세월호 선언 등 9473명, 문화계 블랙리스트 확인'(조태성 기자)을 통해 청와대가 지난해 문화예술계에서 검열해야 할 인물의 명단을 작성해 문화체육관광부로 내려보냈다는 주장과 자료가 나왔다고 전했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11일 예술계 인사 A씨는 한국일보 기자와 만나 "지난해 5월 흔히 말하는 '블랙리스트'가 청와대에서 내려왔고, 우리 입장에서는 이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문체부 공무원들의 푸념을 들었다"며 "실제 이 문건을 직접 보기도 했거니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사진으로 찍어뒀다"고 말했다.

A씨는 "저 말이 진짜일까 싶었는데 이후 예술계에서 이런저런 잡음이 들리면서 정부가 이 블랙리스트를 충실하게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표지 뒤에는 9473명의 구체적 명단이 리스트로 붙어 있고, 이 때문에 문건은 A4용지로 100장이 넘어가는 두꺼운 분량이었다"고 덧붙였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지난해 5월 1일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에 서명한 문화인 594명 ▲2014년 6월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문학인 754명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에 참여한 예술인 6517명 ▲2014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 후보 지지 선언'에 참여한 1608명 등 4가지로 분류됐다.

한국일보의 보도는 도종환 의원이 한겨레에 제공한 예술위 회의록을 뒷받침한다.

예술계 정치검열의 실체가 드러나자, 11일 문화연대는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사실임이 밝혀졌다며 청문회와 예술위 관계자들의 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문화연대는 "소문으로만 떠돌던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존재가 사실임이 밝혀졌다"며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에 대한 검열의 수준이 예술가들을 길들이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이어 "자신들의 눈밖에 난 예술가들을 낙인찍고, 이들이 공공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겠다는 의도를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문화연대는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드러난 작금의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와 대화, 토론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문화연대를 비롯한 문화예술계와 시민사회는 예술검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문화연대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책임자 청문회와 재발방지 대책 수립 ▲예술위 위원장 및 책임자 사퇴 ▲문화예술에 대한 검열문제 재발 시 감사를 진행할 수 있는 (가칭)'예술검열감사위원회' 구성 등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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