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훨씬 가파르게 국면이 전환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두고 몇몇 언론과 기자들이 반성과 성찰을 다짐했었다. 검찰의 언론 플레이에 속수무책으로 동참했던 부역에 대한 자기고백이었다. 그런데 이도 ‘악어의 눈물’이었을까, 그 죽음은 이제 막 삼우제를 지났을 뿐인데, 까마득하다. 사정당국과 언론, 정보당국과 언론의 호응 관계는 여전히 뜨겁다. 제 버릇 개주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어젯밤 MBC와 SBS는 나란히 ‘3남 김정운이 후계자로 지명됐다’고 보도했다. 사실이라면 충분히 헤드라인을 탈 만한 아이템이다. 상호 철통같은 경계를 맞대고 있는 나라의 최상층 권력이 승계되는 문제이다. 심화되고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기가 실은 봉건 왕국을 꿈꾸는 ‘김씨 부자’의 권력 놀음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분개할 일이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좀 야릇하다.

천인공노, 옳다구나 덤벼들었어야 마땅했을 조선일보가 주춤했다. 오늘자(6/3) 조선일보가 넌지시 묻는다. ‘갑자기 친절해진 국정원’을 두고, ‘뭔가 배경이 있는 것 아니냐’고 타이른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3남인 김정운이 후계자로 공식 지명되었다는 정보는 국정원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까진 통상적이다. 국정원은 그런 일을 하는 곳이다. 근데, 국정원이 1일 오후 이 정보를 ‘자발적’으로 야당을 포함한 국회 정보위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알려줬단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 다음인데, 통일부는 즉각 내용을 부인했다. 확인된 정보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청와대 관계자 역시 “김정운 후계설은 첩보와 정보의 중간 단계”라고 선을 그었다. 이쯤 되자 국정원도 슬며시 발을 뺐다. “(북한이 해외공관에 전달했다는) 전문을 입수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 조선일보 6월 3일자 3면.
조선일보의 주춤거림이 국정원에 대한 잔상을 남긴다면, 한겨레에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한겨레는 북한 미사일 추가 발사 등과 관련한 다양한 북쪽 정보를 흘리는 것을 두고, 조문 정국을 북핵 정국으로 전환하기 위한 국면전환용 유출 의혹을 제기했다. 한겨레가 취재한 두 명의 코멘트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한국 정부가) 민감한 군사정보 사항을 언론에 흘린 것에 대해 미국 쪽에서 클레임(이의 제기)을 걸었다”고 한다. 국회 정보위 소속 민주당 의원은 “묻지도 않았는데 국정원이 중요 정보사항을 알려온 건 처음”이라고 했다.

▲ 한겨레 6월 3일자 1면.
그렇다. 물타기다. 검찰의 신들린 언론 플레이에 감읍하사 영감을 얻었는지, 국정원이 ‘자발적’으로 바톤을 이어받아 프레스 프랜들리의 너른 장으로 나오셨다. 일일이 전화를 거는 수고로움으로 대언론 서비스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정보’보다는 ‘홍보’에 익숙할 원세훈 체제의 국정원이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어두컴컴한 조직 분위기를 일신하고, ‘정보는 곧 국가 보도 자료이다’를 실천하는 민원행정의 최일선으로 나선 셈이다.

주목해야 한다. 국정원이 ‘첩보와 정보’의 중간 단계쯤 되는 설(說)로 지상파 뉴스 헤드라인을 갈고, 신문지면을 큼지막하게 장식하는 모습이 흔해질 것이다. 언론의 속성상 ‘첩보와 정보’의 중간 단계는 더 흥미로울 수밖에 없고, ‘감’이 아니라는 냉소가 여전한 원세훈 국정원장이 의욕적으로 ‘트미’한 일들에 주목하고 있다는 ‘첩보와 정보’의 중간 단계쯤 되는 설(說)도 파다하다. 언론이 국정원의 가두리 양식장이 될까? 보도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들 국정원의 떡밥 앞에서 언론이 몽롱한 양식 어류가 되어 헐떡인다면…. 무엇을 상상하든 가장 끔찍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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