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6월 2일, 동아일보 김상만 사장의 덕소 별장에 당시 한국 정치판을 뒤흔들던 정객 6명이 모인다. 이후락, 정일권, 김성곤, 김대중, 이철승, 김영삼씨였다. 김상만 사장이 마련한 이 끈적끈적한 밀월 현장에 동석한 윌리엄 포터 주한미국대사는 한 달 뒤 미 국무부에 9장짜리 비밀 전문을 보낸다. ‘선거 후 파티; 또는, 신문 발행인이 한국 같은 풍토에서 살아남는 지름길’이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얼마 전 대통령 선거 운동이 한창이었을 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고뇌에 대해 한번 언급한 적이 있다. <동아일보>의 선거 보도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학생들과 중앙정보부가 동시에 <동아일보>를 공격해댔을 때의 일이다. (…) 사실 <동아일보>는 공정 보도에 가장 근접해 있는 언론이며, 따라서 김상만 발행인이 선거 이후 중앙정보부와 빚게 될지도 모를 마찰을 사전에 방지해 보려는 것은 충분히 수긍과 동정이 가는 일이다. 선거가 끝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발행인이 편집국장을 통해 내게 그의 걱정거리를 전해 왔다. 정부와 대립한 것 때문에 선임 편집위원을 교체하라는 압력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편집국장은 내가 이해해줄 것 같아 솔직하게 말하겠다면서, 다른 손님들에게는 내가 초대하는 것으로 알리겠으며 각자에게 다른 손님들 명단도 다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단정적으로 말하기를 ‘한국인을 이해하신다면’ 이 파티의 참석률은 분명히 100%일 것이라고 했다. (…) 그렇다면 이 소모임은 결국 ‘미국’ 대사가 만드는 게 되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만약 이후락씨가 참석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선거기간에 당신이 쓴 사설 때문에 <동아일보>가 매질을 당하지는 않게 된다는 걸 뜻하는군요. 저희 사장님 생각이 바로 그겁니다. 나는 대답했다. 좋습니다, 가지요.”

오후 5시에 시작된 이날 모임에는 예상대로 초청된 정객들이 모두 모였고, 중앙정보부의 눈밖에 날까 노심초사했던 <동아일보> 선임 편집자 2명도 동석했다.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모임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밤 9시, 김상만 발행인과 이후락씨는 서로 얼싸안았다. 나는 이 모습을 지켜본 다음 참석자들에게 전원의 이 목가적인 풍경과 이별할 때가 되었으니 나는 이만 자리를 뜨겠다고 말했다. (…) 이튿날 <중앙일보>는 별장의 모임이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며, 성숙한 한국 정치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썼다. 나도 이 말에는 100% 동감이다.”

이런 사실은 2003년 12월 13일 KBS <미디어포커스>를 통해 문건과 함께 공개되면서 <동아일보>의 거센 반발을 부르기도 했는데, 이보다 앞서 문건의 내용을 처음 공개한 것은 <시사저널> 기자였던 저자가 바로 이 책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에서였다. 밖에서 언론 자유를 소리 높이 외치던 젊은 기자들과 여론 장악을 획책하던 서슬 시퍼런 독재 군부의 틈바구니에서 ‘신문 발행인이 살아남는 지름길’은 미국이라는 든든한 후견인을 등에 업은 밀실 정치였음을 문서는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이후에도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에서 찾아낸, 해제된 한국 관련 비밀문서를 토대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발굴한 기사는 심심찮게 등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토론하고, 보고하고, 기록하고, 보존하고 있는’ 미국에 비해 처참할 정도로 박약한 우리의 기록 문화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한동안 높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난 1999년 AP의 노근리 특종 보도로 잠시 휘몰아쳤던 문서 발굴 움직임의 피폐한 실상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 바람은 길지 않았다. 5월 말부터 불기 시작해서 정확하게 6월 20일 전후로 그 바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6월 말, 6·25 동란 관련 문서를 뒤지는 한국인은 문서보관소에서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같은 시간, 문서보관소 한켠에 마련된, 장기간 조사자를 위한 별도의 방에서는 <워싱턴 포스트>에서 파견 나온 특집 담당 조사자 서너 명이 닉슨 대통령의 집무 기록 녹음테이프를 들으면서 ‘닉슨 파일’을 뒤지고 있었다. 1년 7개월째 계속되는 작업이었다. 2000년 6월 미 정부문서보관소는 그렇게 ‘노근리 파일’과 ‘닉슨 파일’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 현장이었다.”

단순한 과거의 기록쯤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미국의 비밀문서는 기록되지 않은 우리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과 정치적 음모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예컨대, 1980년 5월 7일 주한 미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이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한국군 특전단 병력 이동’이란 제목의 20줄짜리 2급 비밀 전문은 광주 민주화 항쟁을 조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신군부가 광주 학생 데모를 진압하기 위한 2개 특전여단의 서울 이동을 사전에 미국에 통보했으며, 미국이 이 특전단의 이동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건이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저자가 “광주를 말하면서 아직도 미 국방정보국 첩보 정보 보고서의 글자 하나 문장 한 줄에 매달려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토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우리 현대사의 많은 부분을 미국 정부의 문서 보관소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 <두 개의 한국>(Two Koreas)을 쓰기도 한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를 만난 자리에서 들은 얘기를 이렇게 쓰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비밀문서 끄집어내 오는 방법을 모른다. 관심도 없다. 다행이다. 찾는 사람이 있으니.” 오버도퍼가 저자에게 건넸다는 쇼핑백 두 뭉치는 <두 개의 한국>을 집필하면서 참고했던 귀중한 미공개 문서들로 결국 이 책의 출발점을 이뤘다.

주한미대사관이 작성한 PLDRL(Potential Leader Biographic Reporting List, 잠재 지도자 신상 명세 보고 프로그램)의 면면을 읽노라면 미국의 ‘한국 관리’가 얼마나 철두철미한지 가히 혀를 내두르게 된다. 오죽했으면 저자는 “주한미대사관의 정보망은 한국 정치판이 배설하는 티끌 하나까지도 남기지 않고 포획한다. 싹쓸이식 정보 수집이다”라고까지 말했다. 일련의 정보 수집과 기록은 놀랍도록 체계적이고 정교한 시스템 하에서 이뤄진다. 미국이 주로 군사적 목적에 초점을 맞춰 철저하게 자신의 ‘국익’을 위해 한국을 관리해온 결과물로서의 비밀문서들은 우리에게는 역으로 한국의 ‘빅브라더’를 자처해온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실체를 읽어낼 수 있는 거울이 된다. 저자가 기록의 중요성을 힘주어 강조하는 이유다. 머리를 후려치는 저자의 한 마디: 기록의 의존은 역사의 의존이고, 의식의 의존이다.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시의 저서 <세상을 바꾼 탐사보도/ 밀라이 학살과 그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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