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해석된다. 내가 존재하고 내가 욕망하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모두 너, 인간관계에서 체득했다는 걸 의미한다. 즉 나는 너다. 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하지 않으면 해석될 의미가 없다. 아니 해석 자체가 불가능하다. 유태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나와 너’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해질 수 있다. 온 존재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타인의 존재 방식을 고려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러면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어머니의 무한대 사랑을 받고 있다. 어릴 때부터 늘 반듯해야 했다. 말대꾸는커녕 어머니 앞에서 비스듬히 앉는 것도 질책의 이유가 된다. 어머니는 20년 전 아버지와 사별했다. “너 지금 이 태도 뭐야. 나 무시하는 거야? 아버지 없어도 난 너 예의 없이 키우지 않았다고 생각해”가 어머니의 말버릇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도예가인 어머니는 그를 위해 ‘맘(Mom) 피트니스 센터’라는 이름의 헬스장을 차려줬고, 신용카드로 쓰는 용돈까지 관리한다. 그는 홀어머니에게서 자란 미혼모를 사랑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사랑에 극구 반대한다. 그녀가 미혼모라는 사실을 몰랐던 때부터 별다른 이유 없이 아들을 뜯어말려온 어머니다.
관계의 흠집은 자기애의 상실로 이어진다. 자신의 인생을 ‘실패’라고 인식하며 삶 자체를 부정하고자 한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맺어진 남녀 관계의 실패는 그녀에게 평생 짐이 된다. 자연적으로 헤어진 사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삶이 자신의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철저히 배격해버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몸으로 낳은 내 자식은 부정할 수 없는 내 삶의 결과물. 이때 지난했던 자기 삶의 반대급부로 내 아이의 삶만은 절대 행복해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키가 급선회한다. 그녀는 자신이 이룬 사회적 성공의 결과물인 ‘부’를 모두 아들에게 갖다 바치며 아들의 삶이 인정받는 삶이길 욕망한다. 그녀가 아들의 사랑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 대상이 ‘미혼모’라는 사회적 편견에 휘말려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내 아들과 어울리는 사회적 지위에 있지 못한 여자, 아들과 똑같이 홀어미에게 자랐기에 아들의 상처를 똑같이 답습할 것 같은 여자이기 때문이다. 행복이라는 개념이 사회적 성공으로 불리는 물질적 부유함이나 명예보다 이들을 통해 혹은 굳이 통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관계 욕망의 긍정적 성취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관계의 실패를 통해 그 소중함을 가장 절실하게 경험했던 어머니가 부정한다는 모순. 그 모순은 내가 이루지 못한 욕망 해소의 대상, 사별한 남편의 대리물로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왜곡된 시선에 그 탄착점이 있다.
도덕에 대한 강박과 그 연장선상에 있는 통제욕구, 그리고 아들을 하나의 꼭두각시 인형으로 물화해서 보는 소유욕도 함께 갖고 있다. 그녀는 늘 자신을 통제하며 살아왔다. 그녀는 사별 이후 ‘수절해왔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다른 남자의 눈길조차 거부했고, 그 반대급부로 더 커진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망을 모두 아들에게 투사했다. 마흔이 넘어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유부남인 그와의 사랑에 부도덕함이란 빨간 줄을 직접 그었다. 그녀가 유독 도덕에 대한 강박에 강하게 압도되는 건 자신의 삶에 흠집이 난 이유를 전적으로 자신에게 귀속시키기 때문이다. 사회관계 속에서 자신이 충실하게 적응하지 못해 실패했으므로 그 자식은 ‘도덕’이라는 사회적 규범에 충실해야만 자신과 달리 관계 속에서 쉽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이만큼 특별하게 꾸며온 삶, 사랑 외엔 언제나 성공으로 이어져온 자신의 삶에서 아들이 삐뚤게 자라는 건 내 완벽한 삶의 흠집이 되기도 한다고 느낀다. 조금이라도 아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니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라고 윽박지르거나 “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러는 거야”라고 합리화시킨다.
관계는 결국 제로섬 게임이다. 삶은 관계를 통해 기쁨과 슬픔, 행복과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형성된다. 이 주고받음은 수없이 얽힌 관계 전체의 시각으로 봤을 땐 결국 제로섬이 되고 만다. 상처를 주는 사람과 상처를 입는 사람 둘 사이의 게임으로 봤을 땐 상처받은 이가 손해일이지 몰라도 결국 상처받은 이는 또다시 다른 사람을 상처받게 하면서 자신의 억눌린 욕망을 해소한다. 사람은 어디선가에서 뺏긴 걸 처음엔 빼앗아간 대상에게, 혹은 그게 되지 않을 땐 다른 이에게서라도 뺏으려 한다. 즉 ‘늘 아낌없이 준다’란 개념과 ‘늘 대가없이 받는다’란 개념은 관계 전체로 봤을 땐 사실 성립할 수 없다. 이때 관계가 나와 너이고 내가 너로 인해 해석된다는 부버의 주장은 얼마나 끔찍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