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에서 그 용어가 부적절하다 하여, 병명을 Swine Flu(돼지 독감)에서 Influenza A(H1N1)로 바꾸어 발표했다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다. WHO는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결과, 또 그 용어의 확산이 불러일으킬 산업적 영향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신종 바이러스에서 ‘돼지’라는 꼬리표를 떼어주었다. 이에 즈음하여, 우리 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의 축산 농가와 산업 관련자들이 돼지(고기)와 이 병의 무관성을 강변하며, 돼지고기와의 연관성을 상기시키는 이 용어에 강하게 반발해 온 것, 나아가 WHO와 각종 연구기관에서도 돼지가 이 병의 근본적 발생처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며, 돼지고기 섭취는 절대 안전하다는 입장을 발표해 온 것, 역시 우리가 주지하는 바다.

▲ 경향신문 5월 7일자 8면.
그럼에도 필자는 이 글에서 문제가 되는 이 질병을 Influenza A, 혹은 신종플루라 하지 않고, 스와인 플루라 부르고자 한다. 굳이 대세를 거스르며, 스와인 플루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병의 발생과 작금의 공장형 돼지 축산업과는 모종의 연관성이 있으리라는 의심을 버리고 싶지 않은 이유 탓이다. 이 병의 출처에 대해서 지금 그 어떤 것도 명확히 나온 것은 없지만, WHO는 이 인플루엔자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돼지 떼에 대해, 동물의학 관련자와 인간 건강 문제 관련자의 공동 주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이미 발표한 상태며(5월2일자 성명), 많은 과학자, 환경운동가들이 공장형 돼지 생산체제와 이 인플루엔자의 발생의 연관 가능성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현대식 돼지 축산업이라 하면, 너무 모호하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첫 번째 환자의 발생지라는 멕시코 베라쿠르즈(Veracruz) 지역의 돼지 농가(공장) 소유자이자 세계 제1 규모의 돼지 축산 기업인 스미스필드(Smithfield) 식 축산업과 이와 유사한 형태의 축산업에 맞추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은, 자회사 돼지고기의 안전성을 말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스미스필드사는 돼지고기의 안전성이 이슈 이외의 질문에 대해선, 그러니까 이를테면 그 생산체제의 안전성, 위생관리법 따위에 대해 답변을 일체 거부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이 기업과 관련하여 알려져야 할 사실은 이 기업이 미국 내에서 이미 1200만 달러 이상의 벌금을 물었고, 주위 환경 파괴 혐의로 연방 정부의 조사를 받고 있는 기업이라는 점이다.

만일 필자가 붙들고자 하는 이 가설, 스미스필드 식 공장형 돼지 생산공정이 새로운 플루의 결정적 진앙지라는 가설이 참이라면, 혹은 적어도 참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판정되는 잠정적으로 유효한 가설이라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에 이어, 다시 우리 눈앞에 하나의 커다란 물음표로서 불거져 나온 것은, 식품 대기업의 공장형 축산 체제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즉, 동일한 문제일 가능성이 높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금 이에 대해 잘 모르고, 잠잠하다. 이유는 대략 네 가지다. 첫째, 이 질병이 한국 내에서 확산될 가능성이 미미해 보인다는 것. 둘째, WHO 등에서 어쨌거나 돼지고기는 안전하다고 발표했다는 점, 셋째, 온갖 미디어에서 질병의 발생 원인이 아니라, 그 추이와 전망, 대처법에만 관심을 기울이도록 국민의 눈귀를 한쪽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려는 목소리가 너무 적은 것도 한몫하고 있다고 봐야 하리라. (그 많은 환경 운동가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

그런데, 스미스필드 제품 돼지고기든, 국내산 돼지고기든, 안전하면 모든 게 해결되고 마는 것일까? 그 ‘안전’은 스와인 플루, 신종 플루로부터의 안전이겠지만, 인간에게 안전한 먹을 거리를 제공해주는 한 과연 인간보다 천한 짐승일 것인 돼지는 그 어떠한 질병 상태에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의 식탁을 방치해도, 생산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앎을 방치해도, 우리는 과연 끝까지 우리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을까?

필자의 입장은, 지난 번 미국산 쇠고기 수입 사태 때와 완전히 동일하다. 설사 그 고기가 완전히 안전해도, 여전히 문제라는 것이다. 설사 우리가 이 새로운 독감 바이러스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는 것이다.

만일, 한국 내에서 이 바이러스 확산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명이 날 경우, 이 이슈는 또 금세 다른 뉴스에 밀려, 우리의 눈귀로부터 멀어져 잊혀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다시, 고통 받는 소들이, 돼지들이 우리의 식탁을 향해, 우리의 즐거움을 향해, 우리의 웃는 얼굴을 향해 소리치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말 터이다. 하지만, 대도시의 대규모 소비체제가 없는 한 스미스필드 식 대규모 생산체제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스미스필드 식 야만과 도시의 즐거움, 그 고기 굽는 소리는 언제나 한 동전의 양면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의 식탁과 관련하여 또 하나 생각해봐야 할 것은, 도시인의 돼지고기 소비라는 것은 공장형 돼지 축산 공정에 대한 무지(無知) 없이는 불가능한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이다. 즉, 도시인의 돼지고기 섭취란 대개는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인 무지와 함께해야만 진행 가능하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는, 내 몸에 좋은 한, 내가 웃을 수 있는 한, 돼지가 어떤 상태에서 길러지든 크게 상관치 않겠다는 무책임한 태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의 소비라는 행위와 내가 알지 못하며, 굳이 알 바 없는, 저 곳에서의 생산이라는 행위를 분리시킴으로써, 그리하여 생산 과정에 대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무지를 확보함으로써,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의 행복을 획득, 유지하고자 하는 행태가 도시 사람들에게는 있다. 또, 이 분리와 무지가 스미스필드와 같은 대기업이 생존할 수 있는 근본 토대임은 말할 것도 없다.

▲ 다큐 '워낭소리' 캡처ⓒ워낭소리 블로그
역시 무슨 독감처럼 우리의 몸을 한번 감싸고 이제는 사라져버린, 다른 영화에 묻혀 더는 논의되지 않는 영화 <워낭 소리> 안에서, 이 영화의 감상 행위 그 자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 역시, 도시인의 이러한 소비-생산 분리다. 필자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며 슬픔보다는 분노라는 감정을 더 많이 느꼈는데, 이는 여기에 등장하는 노인 부부의 자식들(아마도 도시인들)의 행태 탓이다. 그들은 분명 노인 부부로부터 쌀을 공급받는 처지임에도, 그 노인 부부의 ‘사는 게 고생이래’의 삶을 자신의 삶과는 다른 어떤 것, 자신의 삶의 외곽에 있는 어떤 것, 자신의 삶의 세계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는 없는 어떤 것으로 취급하는 듯했는데, 모르긴 모르되, 이 다큐멘터리를 관람한 대부분의 도시인 관객 역시 이러한 태도를 지닌 채 이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았을까. 자신이 누리는 삶의 행복의 세계 외곽에 농촌 세계를 위치시키는 이러한 태도는, 안전만 하다면, 스미스필드건 무어건 돼지고기 생산 과정은 내 알 바 아니라는 태도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

필자의 주장은 너무나 간단명료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멕시코, 미국과 한국, 경북 봉화와 서울) 연결되어 있으며, 생산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 (돼지, 소의 고통) 역시 식탁에서 벌어지는 일 (나의 기쁨, 우리 가족의 행복, 그러나 나중에 우리들 몸에 올지도 모르는 고통)과 모종의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가 우리라고 생각하는 것, 즉 우리의 존재 실체와 어떤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먹을거리와 또 역시 연관되어 있는 다른 생명체의 고통이 우리의 존재 실체와 맺고 있을 모종의 관계 역시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촛불 1년 후에 다시 찾아온, 다른 형태로 날아온 동일한 화두, 즉 식탁에의 탐구다. 식탁에 대한 지금 상태로의 무지가 과연 계속해서 지금의 우리들 그리고 미래세대에게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따라서, ‘여러분, 우리는 안전하답니다~’로 논의를 끝내서는 절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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