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와 축제

지난 5월2일 진귀한 풍경이 목격되었다. 그날은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서울시에서 그야말로 ‘야심차게’ 준비한 하이 서울 페스티벌(이하 페스티벌) 개막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서울에서 한다는 것 외에는 별 관련이 없어보이던 것들이 교묘하게 융합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서울역에 모여 본행사를 마친 시위대는 청계광장으로 자리를 옮겨 집회를 계속 가지려 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들을 저지했다. 마침 그 앞에서 페스티벌의 퍼레이드가 진행되고 있었고, 청계광장으로 들어가지 못한 시위대는 자연스레 ‘경찰에 떠밀려’ 퍼레이드 혹은 퍼레이드 구경꾼들과 섞여들게 되었다. 설사 시위대가 청계광장으로 가려고 했던 것이 페스티벌의 구경꾼들과 함께 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설사 서울시가 일부러 촛불집회 1주년이라는 상징적 시간대를 침범하기 위한 전략으로 페스티벌을 그날 개최하기로 했다고 할지라도, 다른 질감을 가진 두 무리가 그런 방식으로 섞여 든 것은 거의 우연에 가까웠다. 퍼레이드를 이끄는 풍물패는 신명나는 집회를 위해 풍악을 울리는 듯이 보였고, 가면을 쓰고 ‘이명박 퇴진’이라고 적혀 있는 피켓을 든 시위대는 페스티벌을 구경하러 모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2009년을 사는 사람들의 풍경이었다.

시위대 중 일부는 이 수상한 시절에 흥청망청 기분이나 내며 놀 때냐고 한심한 눈길로 퍼레이드를 쳐다보았고, 페스티벌 구경나온 사람들 중 일부는 아름다운 행사를 이렇게까지 망쳐놓아야지 속이 시원하냐는 듯 원망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몇몇 곳에서는 경찰, 구경꾼, 시위대의 마찰이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 또 일부 시위대는 퍼레이드가 연출하는 스펙타클과 흥겨움에 어깨를 들썩였고, 일부 구경꾼들은 작년 촛불집회를 기억하며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피켓을 주워들고 구호를 함께 외쳤다. 그들은 결코 한 덩어리(mass)가 아니었으며, 4부류도 아니었다.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합집산하는 기이한 형상을 띠고 있었다. 그날 결국 시위대는 퍼레이드를 중단시켰고, 개막식 행사가 진행될 단상을 점거했다.

▲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1주년을 맞아 촛불시민들이 2일 저녁 서울 세종로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가로막히자 서울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2009 하이서울 페스티벌’ 행사 무대를 점거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같은날 정부는 5월1일에 있었던 노동절 집회를 이유로 폭력 시위를 자제해 달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보수 언론들은 다음날부터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모양새도 좋았다. 시위대는 폭력의 대리인처럼 보였고, 정부는 폭력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는 보호자가 된 것 같았다. 조선일보는 시위대를 “비(非)시민, 반(反 )시민”이라고 부르며, 시민축제를 “난장판”으로 만든 “막가파”로 매도했으며, 동아일보는 “훼방꾼 시위대”, “불법 시위대”, “불법 폭력행위를 벌인 시위 참가자”가 시민축제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고 비난했다. 보수 언론들은 시위대가 시민들의 문화 행사를 폭력으로 중단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위=폭력’, ‘축제=문화’라는 이분법적 도식이 깔려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폭력은 ‘계몽되지 않은 야만적 행위’라는, 폭력을 비정치화하려는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가 은폐되어 있다.

보수언론과 정부의 논리대로라면 시위대는 시민과 구분된 비시민이다.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페스티벌 구경나온 시민을 잡아갈 이유는 없다. 페스티벌 참가자와 시위대가 뒤섞이기 시작할 때, 경찰은 페스티벌이 진행중인 거리로 뛰어들어와 시위대와 페스티벌 참가자들을 분리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했고 결국 시위대와 페스티벌 참가자는 자연스레 뒤섞였다. 이날의 뒤섞임은 축제와 시위가 문화와 폭력으로 결코 구분될 수 없음을, 나아가 시위가 하나의 축제이고 문화임을, 좀더 나아가 문화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을 통해 유지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2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1주년 기념 행사가 예정돼있는 서울 청계광장 주변을 경찰이 차량으로 에워싸 원천봉쇄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서는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하이서울 페스티벌 행사가 진행중이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도시의 게릴라들

시위는 하나의 문화이다. 그것도 한 사회의 정치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척도로서의 문화이다. 시대별로 공간별로 시위 문화는 상당히 다양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다양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시위 문화가 변화하는 과정을 잘 관찰해보면 사회운동의 내적 성찰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고, 때로는 억압되어 왔던 사회적 모순이 드러나는 방식이나 새롭게 억압되는 모순들이 무엇인지 지켜볼 수 있다. 여성운동이나 병역거부 운동에서 이러한 흐름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일단 다양화된 소규모 시위 방식보다는 촛불집회 같은 대규모 시위 방식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만으로도 간단히 MB 정권의 기초적인 심리 상태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면 시위 지도부의 계획에 따라 본행사와 거리 행진이 이루어졌다. 그러던 것이 2006년 반FTA 집회 이후 계획되거나 통제되지 않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시위가 나타났다. 본행사 이후 거리 행진에서는 계획에 없던 골목길 행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찰이 행진을 막아서면 모여서 항의하거나 행진을 계속하려고 그들과 부딪히기보다는 경찰이 없는 길을 찾아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작년 촛불집회 때 청와대로 가려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경찰은 주변의 모든 길을 막아야 했고, (청와대 주변에 사는 일부 주민들은) 집이 코앞인데 경찰이 모든 길을 막아 놓아 택시를 타고 빙~ 돌아서 집에 가거나, 어쩔 수 없이 시위대에 참여해 경찰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적극적인 시가 행진보다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서 기습적으로 시위를 하는 일명 게릴라식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시위대는 이제 도시의 게릴라가 되어 경찰과 쫓고 쫓긴다. 어찌보면 어릴 때 하고 놀던 숨바꼭질과 얼음땡 같은 놀이를 섞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시위대와 경찰은 도심 속에서 도망과 추격을 반복한다. 물론 이러한 시위 방식의 변화는 경찰의 시위 진압 방식의 극적인 변화와 더불어 나타난 것이다. MB 정권에 들어와 시위 진압은 극도로 강화된 폭력성을 보여주고 있다. 올해 초에 일어난 용산 참사는 그 전형을 보여준다. 게릴라식 시위는 그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다. (여기서 시위대의 폭력과 경찰의 폭력은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경찰 폭력은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고 시위대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라면, 시위대의 폭력은 사회적 모순과 적대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치유로서의 폭력이다.) 경찰의 시위 진압 방식은 단순히 폭력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감시와 통제를 통해 잠재적인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나 통신비밀보호법 등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찍고 감시하기 위한 조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이르면 올 6월 마스크 착용 금지나 통신사업자의 감청 장비 설치를 의무화 하는 극단적인 법률 개정안들이 통과될 수도 있다.

MB 정권의 강박

정부는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불순분자로 미리 낙인찍고 통제하고자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삶에 깊숙히 침투해 불순물들을 걸러내려 한다. 그들이 낙인 찍은 불순물들은 완전히 제거될 수 없는 것들이다. 불순물들은 제거될 수 없다면 분리/격리 되어야 한다. MB 정권의 순수에 대한 강박과 그것의 현실적 불가능성이 만나서 만들어진 것이 ‘평화 시위 구역’이라는 정치적 행위의 수용소이다. 그것은 작년에 제정되어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시범적으로 운영되었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울산 등에 지정된 평화 시위 구역은 유동인구가 적은 지역으로, 시위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시위는 야유회가 아니다. 시위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기네끼리 흥얼거리며 만족하는 행위가 아니다. 시위는 적극적인 정치적 요구를 통해 사회 모순을 폭로하고 적대성을 드러냄으로써 현 정치의 문제들을 드러내고 소통하는 중요한 정치적 장이다. 그것은 비시민들이 벌이는 야유회가 아니라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가 드러나는 공간이다. 시위대와 시민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처음부터 한 몸인 것이다.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당연히 실패한다. 울산에 지정된 평화 시위 구역인 울산역 광장에서는 올 1월부터 지금까지 단 한 건의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다. 울산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올 1월 부터 지난달 30일까지 모두 732건의 집회 신고가 있었고 187건이 실제로 열렸는데도 말이다.

분리 될 수 없는 것들을 분리/격리하려 할 때 극단적인 방식의 감시와 통제 그리고 물리적 폭력이 사용된다. MB 정권의 순수에 대한 강박은 정치의 장에 극단적인 폭력을 기입한다. 시위라는 정치적 행위는 시민 혹은 시민들의 공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시위가 반복되는 만큼 이 정부의 폭력도 반복될 것이다. 만약 폭력을 통해 정치적 발언이 제거된 상태가 달성된다면, 그것을 순수 - 불순한 것들이 제거된 상태 - 라고 할 수 있다면, MB정권이 바라는 정치는 소통 없이 지배만이 존재하는 정치일 것이다. 극단적인 폭력을 매개로 순수를 열망하는 정치 속에서 파시즘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것은 나뿐만일까?

내 꿈은 한량이다. 하지만 일단은 먹고 살아야 되는지라 문화사회연구소라는 곳에서 일도 하고, 공부라는 것도 하고 있다. 그래도 꿈이 한량인만큼 너무 열심히 하지 않으려고 노력중이다. 요컨대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알지 않기 위해 노력중이라는 거다. 이 우주가 무엇을 위해 있고, 또 왜 이곳에 있는지를 누군가가 정확하게 알아낸다면, 그 순간 이 우주는 당장 사라져버리고 그 대신 더욱 기괴하고 더욱 설명 불가능한 우주로 대체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이미 벌어졌다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이론도 있다. 나는 그 이론을 믿는다. 나 때문에 세상이 더 복잡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지 않는다.) 이미 세상은 상식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복잡하니까.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