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 낯선 것,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분명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용기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생긴다.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움 없는 사람인가? 아니면 둘 다 동시에 이뤄지거나……. 꽤나 진지하게 생각한 건데 글로 옮기고 보니 말장난 같다. 내 경우 용기도 없고 두려움도 많다. 그러니 새롭고 낯선 것,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부담과 압박이 크다. 이를 극복할 신념 같은 건 더더욱 없다. 신념을 갖고 용기를 내는 것은 정말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무언가 ‘신내림’같은 확신이 들기 전에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올해로 10돌을 맞았다. 4월 마지막 날 성대한 개막행사가 열렸다. 전주국제영화제 민병록집행위원장은 인사말에서 ‘흰머리가 늘었을 뿐이고, 주름살이 늘었을 뿐’이라며 특유의 유머를 통해 지난 세월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는데, 주옥같은 인사말 중 유독 그 구절이 기억에 남는 것은 10년이라는 특수한 숫자적 개념 때문일 거다.

▲ 4월 30일 열린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지난 10년 동안 나 역시 지역 언론인으로서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그 역사를 가까이서 지켜보았으니 누가 뭐래든 애정 또한 다른 사람 못지않다. 가까운 사람들이 기획 단계부터 참여했었고 홍보와 행사 전반에 걸쳐 노력과 고생 또한 곁에서 생생하게 지켜보았기에 그 실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국제영화제>를 전주에서 개최한다고 했을 때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기에 탄생과정에서의 시련 또한 적지 않았다. 초창기 전주국제영화제는 지역 언론의 뜨거운 감자였다. 출범당시에는 ‘전주’라는 지역에 국제영화제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당위성이, 초반기에는 전주국제영화제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다.

당시만 해도 전주가 1950년대~1960년대 한국영화의 메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 최초의 컬러 영화였던 <선화공주>가 전주에서 독자적인 시스템을 갖춘 <우주영화사>에서 만들어졌고 전쟁영화의 대표작인 <피아골>, <아리랑> 등이 전주에서 제작된 것을 비롯해 <애정산맥>, <성벽을 뚫고>, <애수의 남행열차>, <붉은 깃발을 들어라> 등 당시 흥행작들이 전주를 중심으로 제작됐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진규, 최은희, 허장강, 이예춘, 국악인 출신의 박귀희 김근자 등 인기스타들이 전주로 몰려들었다는 점이 전주가 영화의 중심지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전주영화의 역사성 재조명 작업과 더불어 디지털 영화, 아시아 인디영화를 화두로 한 제1회 국제영화제가 성공적으로 치러졌고 이후 전주국제영화제는 독립영화, 실험영과, 예술영화 들을 통해 관객들과 새로운 소통의 공간을 넓혀왔다.

뚝심있게 밀고 나간 전주국제영화제의 대표적 프로그램인 ‘디지털 삼인삼색’은 매년 전 세계 영화인들이 기다리는 세계적 프로젝트가 되었고, 뒤이어 시작된 “숏!숏!숏!”도 새롭게 주목받는 독립영화 프로젝트로 성장했다.

▲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낯선 영화에 익숙지 않은 관객들과의 만남이 쉽지는 않았겠지만, 이제 <전주국제영화제>의 정체성 따위를 논의로 삼는 사람은 없다. 낯설고 어색했던 실험성은 10년 사이 ‘참신한’ 영화로, 저예산 독립영화는 ‘가능성 있는 새로운 대안영화’로 자리매김됐다. 그만큼 내부에서 시민들의 애정과 영화에 대한 안목이 성장했고 매니아들의 지지는 두터웠다. 영화의 거리가 조성되기 전에는 다 쓰러져가던 동그라미 제과점의 샌드위치와 전주 시네마타운 옆 두 평짜리 중국집 아리랑의 짬뽕, 새참 국수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맛집’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고, 황태와 갑오징어 간장맛이 일품인 다가동 전일수퍼는 영화인들이 전주에 오면 반드시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노란 점퍼의 자원봉사자 <지프지기>들은 영화제 기간동안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스타가 되었고 영화의 거리에서는 끊임없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영화의 거리 곳곳에서는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동안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객들과 1년만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 처음 영화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무용론을 제기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낯선 것의 신선함, 도발적 충격의 실험성을 존중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며 그로 인해 시민정서도 새로운 도전에 좀 더 역동적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영화제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던 대학생은 영화를 전공해서 기획인력으로 성장하는 등 영화제를 계기로 전주는 영화 전문 인력 양성과 영상 산업의 꽃을 피우며 산업과 문화적 측면에서도 성장한 것이다.

지난해 지역 경제유발효과를 조사한 결과 직접적인 효과 28억, 간접적인 효과 100억대 이상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전주영화제를 통해 상승한 전주의 브랜드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것이다. 전주에서는 타 지역의 영화제들이 뿌리 내리지 못하는 동안 안정기에 접어든 전주국제영화제에 대해 지역에서 키워낸 영화제라는 것에 자부심이 대단하다. 자꾸 지역적인 얘기를 강조하다보면 오히려 전주국제영화제의 위상을 지엽적으로 축소시키는 것 같아 우려되는데 전혀 그런 뜻은 아니다. 올해 개막작으로 선정된 <숏!숏!숏! 2009>가 2분 만에 매진되는 진기록을 세웠다는 점에서 <전주국제영화제>가 명실상부한 영화제로 사랑받고 있음을 입증한다.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숏!숏!숏!>은 디지털 삼인삼색과 함께 전주국제영화제가 자체적으로 제작 진행하는 프로젝트. 올해는 영화제 10주년을 기념해 10명의 젊은 감독들이 선정됐다. 지원된 제작비는 작품 당 500만원. 개막식에서 관람한 <숏!숏!숏! 2009 황금시대>는 기대이상이었다. 권종관(동전모으는 소년), 김성호(페니러버), 김영남(백개의 못, 사슴의 뿔), 김은경(톱), 남다정(담뱃값), 양해운(시트콤), 윤성호(신 자유청년), 이송희일(불안), 채기(가장 빨리 달리는 남자), 최익환(유언 Live) 감독이 참여했다. 충무로와 독립영화계에서 분명한 자신의 색깔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들은 ‘돈’을 주제로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주제를 효과적으로 담아내 러닝타임 200분이 지루하지 않게 10인10색의 개성, 실험성, 독특한 미학을 풀어냈다. 처음부터 이 작품을 개막작으로 계획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10주년을 기념해 특별 기획했고 나중에 <숏!숏!숏!> 시사회를 본 영화제 측에서 의도와 취지에 잘 맞아떨어진다고 여겨 개막작으로 낙점했다는 것. 여러 가지 의미에서 <숏!숏!숏! 2009 황금시대>는 이번 영화제 기간 중 최대의 화제작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분명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시도할 수 없는 일들이 전주에서 펼쳐지고 있다. 실험성, 독립성, 익숙하지 않은 것, 두려운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를 내고 보니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류보다는 비주류, 상업보다는 독립영화에 주목하며 걸어온 전주국제영화제의 신념에 박수를 보내며 신인감독과 독립영화를 계속 응원하고자 한다. 비주류(?) 지역방송의 라디오 피디로서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용기를 얻고 있다. 주류에서 할 수 없는 그 무엇, 지역방송에서 할 수 있는 새롭고 신선한 그 무엇, 그 뭔가가 있을 거라는 믿음을 전주국제영화제의 도전정신을 통해 재확인한다. 매체는 달라도 감독들의 창의적 발상과 실험적 도전 정신, 불꽃같은 열정을 배우기 위해 영화제 기간 동안 영화제 거리를 활보할 것이다. 혹시 어떤 영감이나 ‘필’이 신내림처럼 내리꽂힐지도……. 그래, 용기를 내야 해.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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