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유명한 1972년의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있던 기자는 줄잡아 2천여명. 하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뤄본 경험을 가진 기자는 불과 14명밖에 되지 않았다. 마지못해 쓴 기사까지 전부 포함한 숫자가 14명이니까 실제로 워터게이트를 제대로 파고든 기자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난 지 4개월 뒤 갤럽의 여론조사 결과는 미국 국민의 절반이 워터게이트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당시 워싱턴의 한 지역 신문에 불과했던 <워싱턴 포스트>(이하 포스트)는 워터게이트 사건 발발 시점부터 최초의 결정적인 6개월 동안 기자의 이름이 달린 워터게이트 기명기사만 201건을 지면에 실었다. 문제는 큰 신문들의 지속적인 침묵이었다. 같은 기간에 전국 규모의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99건, <로스엔젤레스 타임스>는 45건의 기명기사를 실었다. 워싱턴의 한 지역 신문이 워터게이트 보도에 열을 올리는 동안 주류 언론들은 사실상 이 기사를 못 본 척하고 있었다.

▲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이런 극심한 기사 기근 현상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포스트>가 워터게이트 보도에 열을 올리고 있던 1972년에 신문들은 현직 대통령 닉슨의 재선을 사실상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당시 상황은 닉슨이 재선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텔레비전에서 떠들썩하게 방송되고 있는 동안 <포스트> 편집국에서 쉴새 없이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는 단 두 사람,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을 비추는 영화 <대통령의 음모>의 한 장면에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바로 이 대목에서 워터게이트 보도에 위대함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다.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엔 두 개의 도저히 용서 못할 경향이 상호 작용을 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었다. 하나는 백악관 기자단의 나태함과 타성, 또 하나는 백악관 자체의 부패였다.” 밥 우드워드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70년에 <포스트>에 입사했다가 기사를 어떻게 쓰는지 전혀 모른다는 이유로 신문사에서 쫓겨난 바 있다. 1년 뒤에 <포스트>에 재입사한 뒤에도 한동안 우드워드는 도무지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칼 번스타인은 변변한 대학 졸업장도 없는 볼품없는 배경에, 신문사 안팎에서 늘 이런저런 골칫거리를 몰고 다니는 문제아였다. 당시 우드워드는 29살, 번스타인은 28살이었다. 이렇게 화려한 경력도, 든든한 배경도 없는 ‘우드스타인’(우드워드+번스타인)의 워터게이트 보도를 가능하게 했던 결정적인 원동력을 저자는 딱 한 줄로 명료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들은 다만 기삿거리를 쫓아갈 뿐이었다.”

지난 1977년 일찌감치 국내에 번역된 것으로 돼 있는 우드스타인의 저작 <대통령의 사람들>은 어느덧 흔적조차 찾을 수 없던 차에, 워터게이트를 다룬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과 <워싱턴 포스트 만들기> 두 책이 동시에 번역 출간된 것은 이유야 어찌 됐든 반가운 일이다. 새 책 특유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이 470여 쪽짜리 책을 어떤 이는 ‘무협지’라고 불렀는데, 방대하고도 철두철미하기로 이름난 미국식 저술 방식을 꿋꿋이 계승한 덕분에 이 책은 그 어떤 드라마도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극적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 책의 꽤 많은 부분은 워터게이트 보도 이후 판이하게 엇갈린 길을 걸어온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의 다름을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는데, 단적으로 이런 흥미로운 비유가 나온다. “우드워드는 아주 열심히 일하는 기자였고 번스틴은 직감의 사나이였다. 완전히 토끼와 거북이였다.” 워터게이트 이후 일생의 경력과 사생활에서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완전히 정반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중요한 것은 워터게이트 보도 과정에서 두 사람의 다름이 빚어낸 믿을 수 없이 환상적인 조합과 미국 언론의 역사에 가장 위대한 특종으로 길이 남을 결과물이었다.

워터게이트 보도는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두 사람의 이름을 역사에 깊이 각인시켰지만, 워터게이트 보도 전체가 우드스타인의 전유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하나 등장하는데, 다름 아닌 시모어 허시다. 보도 과정에서 우드스타인이 진정 경외했던 단 한 사람이었던 허시가 <포스트>에 맞서기 위한 <뉴욕타임스>의 대항마로 차출됐을 때 허시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이 위대한 기자들은 후대에 남긴 유산도 같았다. 1970년 밀라이 학살 보도로 32살에 퓰리처상을 받은 허시, 그리고 그보다도 앞선 20대에 워터게이트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은 우드스타인 모두 혹독한 취재과정을 통해 지배 권력의 부패상을 낱낱이 파헤쳐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당대인들로 하여금 가장 높은 수준의 탐사보도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정해진 출입처가 없었던 이들은 집요하고 끈질긴 취재방식에서는 물론 취재원 발굴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발군이었다. 밀라이 보도가 수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앞다퉈 언론사 문을 두드리게 했던 것처럼, 우드스타인 역시 당대 젊은이들에게 피뢰침 역할을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을 소개하는 수많은 보도 과정에서 나는 많은 남녀 기자들이 언론계에 들어온 유일한 이유가 우드워드와 번스틴 기자의 업적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 리처드 닉슨 대통령(1913.1.19~1994.4.23)
이 책의 지향점과는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워터게이트 보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적으로 갈린다.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은 명백하게 닉슨 자신에게 있었지만,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행정부의 모든 의사결정과정의 정점에 있는 미국의 대통령들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기 때마다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고 발뺌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럴듯한 부인(plausible denial)’이다. 하워드 진은 자신의 저서 <오만한 제국>에 이렇게 적고 있다. “최근의 미국 역사를 통해 우리는 나중의 책임회피를 위해 지저분한 일은 아랫사람들을 내세우는 통치자들의 테크닉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닉슨 행정부의 워터게이트 사건의 결과로, 닉슨의 여러 부하들이 감옥으로 갔다. 그러나 정작 닉슨 자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이 되면서 특사 결정을 내림으로써 형사상의 책임을 면했다. 닉슨은 화려하게 은퇴했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지혜로운 조언을 들려주는 노련한 원로정치가, 정치계의 대부로서 대접받았다.” 노엄 촘스키 역시 워터게이트 사건과 같은 시기에 일어난 닉슨 행정부의 대공산 방첩 프로그램 CoIntelPro에 대한 주류 언론의 상대적 무관심과 비교해 워터게이트 보도를 “미국 언론이 거둔 가장 위대한 공적의 하나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가장 부끄러운 실패작 중 하나일 뿐”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워터게이트 보도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명백하게 드러난 결과 뒤에 감춰진 이러한 또 다른 진실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어야 하리라.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시의 저서 <세상을 바꾼 탐사보도/ 밀라이 학살과 그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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