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간다>로 흥행은 물론 2015년 올해의 영화상, 감독상을 거머쥔 김성훈 감독의 새 영화 <터널>이 개봉됐다. <터널>은 터널에 갇힌 주인공 이정수 역 하정우의 고군분투를 그렸다는 점에서, 하정우의 2013년 작품 <더 테러 라이브>와 흡사하다. 더욱 <더 테러 라이브>가 방송국을 폭파하려는 범인을 통해 대한민국의 ‘그림자’를 그렸다면, <터널> 역시 무너진 터널과 거기에 갇힌 한 사람, 그 사람의 구조를 둘러싼 대한민국 각 집단의 이해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2016년판 대한민국의 상징물이 된다. 2013년의 폭파된 방송국과 2016년의 무너진 터널, 그렇게 대한민국은 부서지고 무너져 간다.

웃픈 재난극

영화 <터널> 스틸 이미지

하지만 시시각각 조여 오는 방송국 폭파범의 협박에 핏대를 올리던 <더 테러 라이브> 속 앵커 윤영화였던 하정우와, 무너진 <터널>에 갇힌 자동차 딜러 이정수인 하정우는 다르다. 영화 초반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기가 바쁘게 길을 떠났던 그는 곧 전화 업무조차도 터널이 끝난 이후로 미루었지만, 곧바로 무너진 터널은 그를 가두고 만다. 하지만 생활력 강한 남편이자 아빠인 이정수는 무너진 터널 잔해에 깔린 상황에서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119에 신고를 하고, 곧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는 응답에 재난 매뉴얼에 따라 차분히 생활의 리듬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 자신의 소변을 받아 마시려고 하면서.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포기하는 그 순간까지도.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터널에 갇힌 주인공. 그 대강의 줄거리만 보면 '재난' 영화로서 특별한 사건이 없을 듯한 이 딜레마를 구하는 건 뜻밖에도 웃음이다. 하지만 여기서 웃음은 '기쁘거나 즐거울 때 나는 표정이나 소리'의 그 웃음이 아니다. 첫 장면 주유소에서 귀가 안 들리는 노인 주유원과의 해프닝부터 시작된 '삐져나오는 실소'는 지루한 터널 속 이정수의 고전 내내, 그리고 마지막까지 영화를 관통한다.

무너진 터널에 갇힌 후 겨우 정신을 차려 가까스로 신호가 잡히는 차 뒤편에 손을 한껏 뻗어 119에 신고를 한 이정수. 하지만 그의 절박함에, 119 교환원은 '매뉴얼'대로 가장 형식적인 응대를 한다. 바로 그 '매뉴얼에 따른 형식적'인 응대로부터 시작하여 영화 내내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상황들은 바로 한 사람의 목숨을 도롱뇽만큼, 아니 생명을 생명으로 존중하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이 순간순간 삐져나오는 그 순간들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그런데 그 어이없는 상황이 너무도 현실적이라 삐져나오는 헛웃음. 어쩌면 그게 바로 영화 <터널>이 가닿는 주제의식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터널> 스틸 이미지

세월호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감독의 덧댄 설명이 아니더라도, 아니 굳이 세월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터널 속에 갇힌 이정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상황들은 모두가 너무도 잘 아는, 그래서 실소밖에 나오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매뉴얼'을 따지는 공무원들. 거기에 한 술 더 떠 '사진' 찍는 것이 더 중요한 듯 자신의 처신이 더 우선인 그 윗급들. 그들 못지않은 이정수가 빨리 나올까봐 우려하는, 생명을 '기사거리' 취급하는 '언론'들. 그리고 '생명'에 대해 무뎌지고 이해타산적인 '여론'이란 이름의 우리들. 그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각자들은 맡은 바의 자리에서 터널 속에 갇힌 이정수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공범'이다. 영화를 보며 그것들을 실감나게 확인하며 씁쓸한 공범 의식에 도달하게 된다.

영화 <터널>이 빛나는 건, 세월호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호의 부정과 부실 그리고 부도덕을, 이정수가 갇힌 무너진 터널이라는 재난 상황을 통해 기가 막히게 모사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부산행>을 비롯한 다수의 영화들이 대한민국을 빗대어 말하고 있지만, <터널>만큼 대한민국 각계각층의 부도덕한 면면을 신랄하게 그려내고 있는 영화는 없었던 듯하다.

너무도 '인간적인' 김성훈 식 재난 영화

영화 <터널> 공식 포스터

온 나라가 이정수 구하기에 나선 듯 호들갑을 떨어대던 세상은 그가 터널에 갇힌 뒤 시간이 흐르자,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경제적 손실을 들먹이며 살아있는 이정수를 죽은 사람으로 호도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인명 손실조차 고스란히 이정수의 몫으로 돌리며 '여론'의 질타 대상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그래서 결국 그의 아내에게 제 2터널 공사 시작에 대한 서명까지 강요하는.

이정수가 즐겨듣던 클래식 방송을 찾아가, 어쩌면 살아있을지도 모를 이정수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구하러 가지 않을 테니 기다리지 말라며 오열하는 아내. 영화는 계속 되지만 영화가 절묘하게 모사해 내는 현실은 거기까지다. 지금까지 신랄하게 현실을 모사해온 대로라면, 세월호가 그랬듯, 이정수는 결국 그 누구도 구하러 오지 않는 터널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맞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었으니까. 하지만 <터널>은 잠시 주춤거리지만, 그래도 이정수를 구한다.

<터널>에서 이정수가 살아 세상을 맞이하는 방식은 예의 재난 영화 속 그것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그 좌절과 절망의 상황에서 '인간적인 의지'로 모든 역경과 어려움을 이기고 '인간 승리'의 역전극을 써내려간다. 물론 모두가 포기한 이정수를 단 한 사람, 그와 함께 그가 마셨던 오줌까지 '동참'하려 했던 구조대장 대경(오달수 분)에 의해 포기했던 가능성의 돌파구를 열었지만, 그것은 천만 영화 <부산행>의 감동과 신파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마지막 '다 꺼져, 이 새끼들아'라는 이정수를 대변했던 대경의 그 한 마디처럼, 오히려 이정수의 생존은 대한민국을 무안케 하고, 우리에게 '숙제'를 남긴다.

이정수를 살린 것은,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도리를 저버리지 못한 대경의 시도이다. 그리고 그것이 김성훈 식의 '인간주의'이고, 이 영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김성훈이 그려내는 '인간'은 흔한 재난 영화의 영웅이 아니다. 영웅이라기보다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최후의 도덕적 양심’에 가깝다. 그리고 그건 그의 전작 <끝까지 간다>에서의 인간상과 일맥상통한다.

영화 <터널> 스틸 이미지

<끝까지 간다>에서 주인공 고건수(이선균 분)는 결코 도덕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장례식 날 뜻하지 않게 저지른 교통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어머니의 시신조차 유기하는 파렴치범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는 진짜 '도덕' 따위는 밥 말아먹은 박창민(조진웅 분)을 상대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예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마찬가지다. 터널 속에 갇힌 이정수는 자신처럼 갇힌 미나를 독려하면서도, 그녀와 물을 나누는 데 주춤거린다. 자신의 생명줄을 나누어 주는 그 순간에 주저하던 그. 하지만 결국 그는 그녀의 저승길에 메마르지 않게 자신의 생명수를 나누어 준다.

바로 그 지점, 그것이 김성훈이 말하는 '인간'이다. 대경도 마찬가지다. 내내 대책반의 구조 대장이었지만 정부의 보여주기식 구조 대책에 휩쓸려 다니던 그가, 그저 하는 것이라곤 기자들을 상대로 목소리나 높이던 그가, 그래도 갇힌 이정수에 공감하기 위해 자신의 오줌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 최소한의 '역지사지'. 모두가, 심지어 아내조차도 여론에 떠밀려 이정수의 죽음을 시인해야 했던 그 상황에서,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마지막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바로 '생명의 젖줄'이 되었다. 김성훈은, 멋진 영웅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무너진 터널 같은 대한민국에서 포기해서는 안 될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를 물으며 영화를 마무리한다.

덕분에, 영화는 흔한 재난 영화로서의 통쾌한 역전 블록버스터는 되지 못했다. 감동과 신파의 도가니도 선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터널에서 구조된 이정수의 '꺼져 이 새끼들아!'만으로도 충분히 현실적으로 통쾌했고, 그랬기에 우리 모두가 고민할 수 있는 진솔한 주제의식을 남긴다. 다수의 영화들이 세월호를 비롯한 무너진 대한민국의 현실을 이야깃거리로 삼는다. 과연, 우리는 이 사회에 대해 어떤 목소리를 내어야 할까. <터널>은 그 고민의 깊이가 진솔하게 와 닿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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