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시절을 산 권필(權韠)이라는 문인이 있었다.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석주(石洲)이며, 승지(현 청와대 비서관)를 지낸 기(祺)의 손자이며, 벽(擘)의 다섯째아들이다.

그는 1569년 허균과 같은 해에 태어나 송강 정철(鄭澈)의 문하에서 활동하였다.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구속받기를 싫어하였고, 평생을 야인으로 살다가 삶을 마쳤다. 동료문인들이 더러 벼슬자리를 추천하였으나 번번이 이를 마다하였으며, 한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책에 임명됐으나 윗사람에게 굽힐 수 없다며 사양했다.

그는 절개가 높아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으며, 또 시류에 영합하지도 않았다. 시재(詩才)가 뛰어난 그는 시대의 울분과 갈등을 시(詩)로써 토로하였고, 또 부패한 권력에 맞서서 이를 비판, 풍자하는 데도 서슴지 않았다.

광해군 초의 일이다. 당시 권세가 이이첨(李爾瞻)이 그에게 교제를 청해왔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태생적으로 권세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권세가들은 이런 사람과 가까이 지내려고 하는 경향이 종종 있다.

이이첨은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 시절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을 가르쳤으며, 게다가 선조에게 광해군이 세자로 적합하다고 주장하다가 유배를 다녀왔다. 광해군이 등극하자 이이첨은 ‘실세’가 됐고, 과거(科擧) 업무도 주관하였다.

그 시절 권세가가 한 사람 더 있었다.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이었다. 광해 3년, 즉 1611년에 과거가 치러졌는데 이 때 ‘사건’이 하나 터졌다. 별시문과 응시했던 임숙영(任叔英)이 지은 대책문(對策文)이 말썽이 됐다. 임숙영은 유희분 등 왕실의 외척들이 정사를 그르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보기 나름으로는 ‘대역죄’에 해당할 만한 중대 사안이었다. 그러나 이이첨 정권에서 우의정을 지낸 심희수가 어렵게 급제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걸로 ‘임숙영 사태’가 마무리된 게 아니었다. 임금인 광해가 이를 불쾌하게 여겨 임숙영의 급제를 취소시켰다.

‘절개의 선비’ 권필이 이를 그냥 보고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세태를 꼬집었다.

宮柳靑靑花亂飛 궁궐 버들은 푸르고 꽃잎은 어지러이 흩날리는데
滿城冠蓋媚春暉 성 안에 가득한 벼슬아치들은 봄빛에 아양을 떠네
朝家共賀升平樂 조정에서는 태평하고 즐겁다고 서로들 치하하는데
誰遣危言出布衣 그 누가 위험한 말이 선비에게서 나오게 하겠는가

사람들은 여기서 ‘궁류(宮柳)’, 즉 ‘궁궐의 버들’은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항간에서는 광해의 처남인 유희분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즉, 성씨가 버들 유(柳)씨인 유희분을 빗대서 쓴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간신’으로 지목된, 당대의 권세가 유희분이 가만히 앉아서 당할 리 없다. 유희분은 ‘궁류’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여동생인 왕비를 지칭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광해가 노여워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광해는 이 시를 지은 사람을 당장 잡아들이라고 특명을 내렸고, 이 시를 지은 권필은 마침내 광해 4년 의금부에 잡혀 들어갔다. 권필은 의외로 ‘변명’하였다. 자신의 시는 임숙영이 포의(벼슬 없는 사람)로서 위험한 말을 한 것을 읊은 것이라고.

권필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광해는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여러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치 역적 대하듯 궁궐에서 형(刑)을 가했다. 그리고는 권필을 전라도 해남으로 귀양 보냈다.

원래 몸이 약했던 권필은 들것에 실려 도성(都城) 문을 나왔다. 사람들은 이 사연을 알고 슬퍼하며 한잔 술로 그를 위로하였다. 그 술잔을 받아 마시고 취해 누운 그는 장독(杖毒) 때문에 그 길로 죽고 말았다. 권필의 나이 44세였다.

‘옳은 말’ 하다가 억울하게 죽은 권필은 그 후 어찌 됐을까?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세상이 바뀌자 그는 억울함을 풀었다. 그는 사헌부 지평(정5품)에 추증되었고,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역사의 정의가 있다면,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신경민 전 MBC 뉴스데스크 앵커 ⓒMBC
엊그제 MBC 뉴스데스크 신경민 앵커가 앵커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번 인사를 단행한 사람은 엄기영 MBC 사장이다. 어찌 보면 한 특정 방송사의 그 많고 많은 인사(人事)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연유’가 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경민 전 앵커는 뉴스데스크 말미에서 이른바 ‘클로징멘트’를 통해, 간혹 이명박 정부의 인사들이 들으면 귀에 거슬릴 발언을 더러 해 왔다. 세상 사람들은 신경민 앵커가 그 때문에 쫓겨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믿는 데는 상당한 근거도 있다. 한 여론조사 결과가 그것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에서 신경민 앵커 교체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더니, ‘정치적 외압에 따른 것으로, 문제가 있다’는 응답이 50.4%로 나온 반면, ‘경영진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별 문제없다’는 응답 27.9%였다고 한다. 진실이야 어떻든 세상 사람들은 이리 믿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민심이다.

인터넷 광장에서 ‘경제대통령’으로도 불린 ‘미네르바’ 박 모씨. 그는 이른바 ‘유언비어 유포죄’로 구속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그럼 ‘환율정책 실패’로 지난번 개각 때 교체된 강만수 전 장관은? 구속은커녕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입다물 것!’을 강요받은 사람은 비단 미네르바 한 사람 만이 아니다. <88원 세대>의 저자인 경제평론가인 우석훈 박사도 그런 압력을 받았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인터넷 규제와 탄압은 그 정도가 도를 넘었다고 한다.

비단 개인 차원만이 아니라 정부기관조차도 ‘압력’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KDI는 최근 수도권 규제를 대폭 축소, 철폐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펴냈다. 지난 정권에서는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중앙정부가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간 금산분리 원칙을 고수해오던 금융연구원도 새 정부 들어 입장을 바꿨다. 최근 물러난 이동걸 전 원장은 이임사에서 이런 처신을 강하게 질타했다. “정부가 연구원을 싱크탱크가 아니라 마우스탱크(Mouth Tank)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고.

비판한다고, 제 입맛에 안맞다고, 그런 입들을 다 입다물게 한다면, 그 결말은 어디인줄 아는가?

꽃도 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달도 차면 기운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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