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관리와 간섭이 때때로 도를 지나치기도 한다. 친구 따라 강남 가버릴까 노심초사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리지 말라, 이성친구와의 교재는 대학 들어가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며 훈계한다. 훈육한다. 지금 세대에게도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일상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90년대까지는, 그러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소위 ‘개방적’이라는 부모님을 둔 아이들의 경우를 제외하면 사실 아이들의 사정은 엇비슷했다.

MBC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 ‘아이돌특집’에 나왔던 90년대 아이돌 스타들은 신인시절 겪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들 그러니까 좋게 말하면 ‘엄격한 관리’ 나쁘게 말하면 ‘감금’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었다. 화장실 좁은 문으로 탈출을 강행한 신화의 에릭, 필요한 물건은 매니저가 직접 사서 숙소로 가져다줬다는 HOT 등 10여년도 훌쩍 지나버린 그/녀들의 그 당시 이야기들은 사뭇 어린 시절의 보편적 훈육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그렇다면, 이 관계는 어떠한가? 부모/기획사 - 자식/소속연예인. 유사하다. 훈육의 관계이다. 물론, 자식은 소속연예인처럼 ‘상품’은 아니다. 그래서 어쩌면 더욱 아찔하고 잔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10년이 지나면 우스개가 되어버리는, 연예인에 대한 ‘철저한’ 관리·감독은.

연예인과 소속사 간의 분쟁, 연예인에 대한 소속사의 무자비한 횡포는 우리에게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배우 전지현의 소속사 휴대폰 도청, 고 장자연으로 들썩였던 부당한 노예계약은 떠들썩했지만, 여전히 그대로 진행 중인 연예계의 고정불변한 치부이다. 연예인에 대한 소속 기획사의 사생활 침해는 인권에 대한 공격이며, 위협이다. 그리고 대다수가 공감하고, 분노하는 이슈다.

어느 재판부, “의심할 여지가 있었다면 미행해도 괜찮다”

▲ 4월13일자 경향신문 13면.
그런데 법원, 그 재판장엔 그 분노가 없었나 보다. 차분하다 못해 역시 잔인했다. 3월 24일 서울고등법원은 가수 ㅂ씨와 ㅇ엔터테인먼트사가 서로 제기한 계약부존재확인과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대해 “연예인에게는 이미지 관리가 중요하므로 원고의 사생활을 일정부분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소속 연예인의 사생활에 실제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여지가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하여 본다면 위반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원고였던 ㅂ씨는 피고 ㅇ엔터테인먼트사에게 80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 재판부가 ㅇ엔터테인먼트사가 주장한 전속계약상 의무 위반에 따른 위약금에 대해 손해배상청구로 변경하고 원고인 ㅂ씨에게 8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또한 재판부는 ㅇ엔터테인먼트에게 전속계약상 채무불이행을 근거로 ㅂ씨에게 위자료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하였다.

과도한 사생활 침해, 전속계약의 불공정성의 문제를 제기했던 가수 ㅂ씨에게는 꽤나 처참한 결과다. 법원은 결과적으로 엔터테인먼트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오히려 불공정한 계약 내용에 대해서 ‘신인’이라는 점과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가 큰 분야로써 연예계를 판단하면서 계약의 유효성을 강조하였다. 계약에 따라 연예기획사가 소속연예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점을 일정정도 인정한 셈이다.

공정위, “연예기획사의 사생활 침해 시정하라”

지난해 11월,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는 “무상출연 강제, 과도한 사생활 침해 및 계약의 일방적 양도 등 연예기획사 전속계약서의 불공정 조항 적발 시정”을 10개 대형 연예기획사(IHQ, JYP엔터테인먼트, SM엔터테인먼트, 올리브나인, 팬텀엔터테인먼트, Mnet미디어, BOF, 예당엔터테인먼트, 웰메이드스타엠, 나무액터스)에게 요구하였다. 이후 공정위는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 “연예산업의 공정한 계약관행이 확립되도록 연예기획사관련협회·연예인단체와의 협조체계를 통해 자진시정을 유도, 표준계약서 제정 및 상시 감시활동을 보다 강화할 예정”이라고 전하였다. 하여간 당시 공정위는 “10개 대형 연예기획사의 불공정한 전속계약서 시정”으로 조항의 자진시정과 더불어 총 204명의 연예인의 계약서를 수정·체결하였다 밝혔다.

특히 과도한 사생활 침해에 대해서 “항상 위치를 기획사에 통보하고, 사생활 일체를 기획사와 사전에 상의하여 연예기획사의 지휘감독에 따르도록 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면서 “을은 을의 신상문제, 사생활(신변, 학업, 국적, 병역, 교제, 경제활동, 사회활동, 교통수단 등)과 관련하여 사전에 갑에게 상의하여 갑의 지휘감독을 따라야 한다”라는 계약서를 작성토록 한 JYP엔터테인먼트에 시정을 요구하였다. 또한 올리브나인, 웰메이드스타엠, 팬텀엔터테인먼트의 전속계약서에서 발견된 “을은 자신의 위치에 대해 항상 갑에게 통보하여야 한다”는 문구 역시 문제가 되었다. 이후 각 연예기획사는 관련 내용을 ‘삭제’하는 등 자진 시정을 취하였다.

지금까지 드러난 전속계약에 있어 소속 연예인의 사생활 침해는 빙산의 일각이다. 소위 ‘노예계약’이라 불리는 계약서는 불공정한 모든 것의 집결체다. ‘갑’이 제작하는 행사 내지 ‘갑’이 요청하는 행사에 ‘을’은 무상으로 출연해야 하기도 한다. ‘을’은 ‘갑’의 통제를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기도 하고, ‘갑’에 의해 제3자에게 아무 이유 없이 양도되기도 한다. ‘을’의 권리는 모래알 속 진주이고, 의무는 모래처럼 가득하다. 계약 위반 시 손해배상예정액 및 위약벌에 관한 조항 역시 무조건 연예기획사에게만 유리하다.

▲ 유키스 멤버 케빈, 전 소속사 간 체결된 전속계약이 무효라는 판결을 받았다. @ 유키스 공식 홈페이지
결국 고 장자연씨의 문제는 리스트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를 옭아매었던 ‘노예계약’의 문제였다. 결국 공정거래위원회는 또 한 번 중소 연예기획사들과 연예인들이 체결한 문제 가득한 전속계약서에 대한 조사를 착수한다고 밝혔다. 소위 ‘장자연법’이라 불리며 연예매니지먼트사업법 추진을 위해 논의도 시작된 상황이다. ‘정책적’ 측면에서의 연예인에 대한 불공정한 계약 실태를 개선하고자 하는, ‘사회적’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시점이다.

이뿐만 아니라, 진화한 법적 판결도 있다. 지난 4월 12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5부는 아이돌그룹 유키스 멤버 케빈과 전 소속사 간에 체결되었던 10년 계약이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10년은 연예 산업 위험성을 감안할 경우 합리적인 정도를 초과, 공정을 잃었으며 이익분배와 계약 위반시 손해배상예정액 및 위약벌 관련 조항은 연예인의 인격적 주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해 사회질서에 반하는 계약 조건이다”라는 것이다.

결국, 난독증을 의심한다

연예인은 미행당해도 좋다는 지난 3월 24일 판결은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외치는 용기라고 평가하기도 난감한 무엇이다. 연예인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소속연예기획사가 그/녀의 사생활을 관리해야 하고, 더욱이 의심할 여지가 있다면 “100%입니다”라니. 개그콘서트의 <독한 것들> 뺨치는 재판부이다. 연예인들의 ‘노예계약’은 부모가 자식을 훈육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연예인 전속계약은 연예기획사와 연예인 상호간의 신뢰관계를 기초로 하여 체결되고 유지되는 점”으로 평가한 재판부를 뭐라 해야 할까. 차라리 내 난독증을 의심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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