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당선으로 북아메리카 대륙을 비롯한 전 세계가 들썩였고 이를 바라보는 한국인들도 놀라움에 동요했다. 흑인들이 받은 온갖 핍박만 놓고 봐도 기립박수 맘껏 쳐 줄 일임에 틀림없었다.

필자도 내심 찬사를 보냈었다. 그러나 그가 당선이 유력했던 후보 시절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 드는 생각은, 오바마 역시 지구상 초강대국을 움직이는 미국 내 유대인 두뇌집단과 경제력 기준 상위 1% 앵글로색슨의 ‘주문’을 대체로 성실히 수행할 것이란 점이다. 피부색만 빼면 일상적인, 그저 민주당 출신 대통령일 뿐이다.

대내적으론 과거의 ‘흑인민권운동’에 버금가는 정책을 펴나가면서 흑인과 노동자의 지위 향상 등에 힘쓸 수도 있겠지만 대외정책에 관한 한 부시 정권의 것-나아가 아메리카 전통의 것-을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름 아닌 미국의 패권주의, 나쁘게 말하면 침략성 또는 ‘사사건건 간섭’ 주의다. 섣부른 진단이긴 하지만, 서서히 고개를 드는 오바마의 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정책은 부시의 것을 뒤엎지 못하고 있다.

대 한국 정책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라 본다. 흑인 대통령이라고 해서 한반도 남북관계가 유례없이 호전돼서 왕성한 교류가 이루어지길 바랄 이유는 없다. 일정 수준의 군사적 긴장 관계를 유지시키면서 낡은 전쟁무기 계속 팔아먹고 부시의 신자유주의를 한국엔 계속 적용시켜 미국계 투기자본의 경제적 침탈만 원활히 성사시키면 그만인 것이다.

오바마 취임 100일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북한이 로켓을 발사했다. 근데 인공위성인지,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인지가 1만 미터 깊이의 태평양을 겨냥한 모양이다. 김정일 정권이 정신 나가서 일본이나 미국 영토에 미사일 발사하지 않는 한, 아무리 강경해봐야 북한과 전쟁 개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미국도 잘 안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의 새 정권은 국제 사회에서 대북 강경책을 주문하고 나섰다. 당선 전과 후의 태도가 매우 다르다.

▲ 경향신문 4월8일자 2면 기사
부시가 그랬듯, 마냥 가지고 논다. 놀림 당하는 쪽은 이번에도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다. 한국 정부와 언론이 호들갑 떨어주니까 보다 재미있을 것이다. 청와대는 엄청 급박한 것처럼 벙커 회의를 개최했고 로켓 발사 전후로 우리 방송들은 뉴스 전체를 도배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정작 알맹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CNN과 폭스뉴스 등 주요 미국 방송사들도 속보를 여러 꼭지 내보냈지만 앵커나 기자들의 표정이나 말투에서 긴장감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CNN은, ‘North Korean launch not a cause for panic(북한의 발사는 위험 요소가 못 됨)’이란 제목으로, ‘설령 미사일을 장착했다 치더라도 캘리포니아까지 보낼 기술이 북한은 없다’고 말하는 전문가 칼럼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발사 당일(미국 시간으로 4월 4일 토요일) 백악관과 미 국무부가 평소 주말처럼 휴일체제로 근무했다는 사실도 미국의 속내는 느긋하다는 점을 방증한다.

속으론 ‘쏴봤자 뭐’ 하면서 겉으론 유엔 안보리 제재가 필요하다는 둥 설쳐대는 게 오바마의 대북정책이라면 부시 정권이랑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오바마에게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같은 인물보다 이명박 대통령이 훨씬 편하다. 알아서 따라와 주니까 쉽고, 남한이 ‘좌빨’이니 ‘반공’이니 너무 오버한다 싶을 때 적당히 다독이면서 자기네가 한반도 제1의 중재자임을 대내외에 새삼 천명하면 된다. 나중에 설령 오바마가 북한에 유화 정책을 써도 미국은,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불만을 표하지 못할 것을 안다.

미국의 ‘힘’을 부인하거나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수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상황은 여전히 연출되고 있다. 네티즌들 흔히 하는 얘기로 틈만 나면 ‘좌빨’ 트집이다. 정부 정책만 비판해도 무조건 좌빨로 몰아대는데 이번과 같이 북한이 직접 관계된 사건은 오죽하겠는가.

뭐만 나오면 좌익이니 용공이니 떠들고, ‘잃어버린 10년’이라 주장하는데, 그 10년이 그토록 못마땅하면 전쟁 한번 하는 게 어떤가. 곧 사회로 돌아올 기간병들 말고, 강경책 주문하는 한나라당과 뉴라이트, 해병전우회 등이 나서서 북한 인민군과 총 들고 싸우는 거다. 그런 대북 강경책이고, 보수 강경론자들만 참가하는 전쟁(혹은 전투)이라면 생각을 달리해볼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좌빨 운운하는 이들도 잘 안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은 희박하단 것을. 다만 남북관계가 과거 10년보다 훨씬 더 삐걱거리길 바랄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입지가 넓어지고 국민과 언론의 국내 정치에 대한 관심을 외부로 돌릴 수 있다.

대북강경론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설 때 누구나 예상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강경한 정책과 각종 전술을 구사하는 대상이 북한이 아니라 국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에게 ‘북한’은 핑계요, 도구일 뿐이다.

북한과 미국은 장군·멍군을 주고받고, 일본은 옆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중국과 러시아는 뒷짐 지고 서서 가끔씩 훈수만 둔다. 미국에서 교체선수가 오면 북한은 어김없이 ‘장군’을 외친다. 미국이 어떤 수로 맞서든 간에, 한국은 잘 뒀다고 난리다. 난리치면서 주요 관심사는 다른 곳을 향해 있다.

필자가 한반도 정세에 대해 초보 수준으로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정부는 자국의 국민들한테 물대포를 쏘지만 미 민주당 정권이나 북한을 상대로 싸우진 않는다는 것이다. 적(敵)은 워싱턴이 물론 아니요, 평양도 아닌 바로….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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