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영국은 무엇인가? 셰익스피어, 비틀스, 여왕 혹은 신사의 나라, 모두 아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영국은 데이비드 베컴이다.

그렇다. 베컴은 곧 영국이다. 환상적인 재능, 더 환상적인 외모, 완전히 더 환상적인 로맨스까지. 게다가,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의 영국 국가대표팀 주장이었다. 베컴이 영국이라고 하는 국가의 ‘실체적 환상’이라는 데 더 긴 설명이 필요한가? 그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젠가부터 영국의 상징, 재림한 ‘영웅’의 신화적 내러티브에 완벽히 끼워맞춰진 듯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는 데뷔 채 두 시즌을 맞기도 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사상 가장 위대한 젊은 스타”가 되었다. 1997년 출간된 그의 전기에는 그 놀라운 두 시즌이 한 문장으로 요약되어 있다. “믿어지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는 세 번째 시즌이던 96년, 일말의 객관성마저 굴복시키는 환상의 골을 쏘아 올린다. 윔블던과의 경기 도중 하프라인 부근에서 쏘아 올려진, 이제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된 이름, “세기의 골”이다.

그보다 더 완벽할 수 없을 것 같던, 불행이 비껴갈것 같던 인생을 살던 그에게도 ‘운명의 접촉사고’는 찾아온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16강전이었다. 상대는 포클랜드 전쟁의 적국이었던 아르헨티나였다. 하필이면, 그래 하필이면 영웅의 운명은 어쩜, 그 석연찮은 우연에 절대적으로 기대어 완성되고 또 보존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후반 1분, 백태클에 대한 보복행위를 감행하고 퇴장을 ‘택’한다. 영국은 져서는 안되는 경기에서, 바로 아르헨티나에게 패했다.

영국의 어느 언론은 한 문장으로 당시의 상황을 압축했다. “그라운드에는 열 명의 영웅과 한 명의 얼간이가 있었다.” 영웅이 얼간이가 된 찰나의 순간이었다. 다시 한번, 하필이면 그는 그날, 아빠가 되었다. 이듬해 매경기 야유가 터졌지만, 그는 팀에 프리미어리그, FA컵,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동시에 안겼다.(트리플 크라운) 이후 그의 인생은 아시다시피이다. 따로 설명하진 않겠다.

오늘 미디어에게 김연아는 무엇인가? 피겨선수, 세계선수권자, 여왕 혹은 그 모두, 아니다. 엊그제 이후 미디어에게 김연아는 한국 그 자체였다. 김연아가 2009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 피겨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이후 미디어는 매일 어지럼증을 겪고 있다. ‘예고’된 우승에 자지러지고,. 고려대가 김연아를 ‘낳았다’고 출렁였다. 그리고 어제는 마침내 그녀가 ‘예정’대로 돌아왔다.

예고된 우승, 준비된 자지러짐

▲ kbs 4월 1일 뉴스 화면 캡처
김연아의 우승 소식을 전하던 지난 29일(일), 지상파 3사는, 서로 짜기라도 한 듯, 각각 15건씩, 관련 보도를 질펀하게 토해냈다. 뉴스 전체에서 김연아 보도가 차지한 비율은 mbc 62.5%, kbs 57%, sbs 55.5%였다. 방송 3사 모두 절반 이상 도배 아니 올인 그것보단 더 격한 무엇, ‘몰빵’했다. 뉴스가 이토록 완벽하게 하나의 이름에 장악 당했던 경우는 대통령 당선과 탄핵 정도를 제외하면, 아마도 당분간은 황우석과 김연아뿐이었지 싶다.

맞다. 황우석. 멀리 영국까지 갈 것도 없었다. 미디어가 김연아를 다루는 방식은 딱 황우석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영웅’의 신화적 내러티브는 반복되고 있다.

당시, 황우석의 연구는 과학이라기 보단 ‘난치병의 절멸과 한민족이 중심 되는 인류의 내일에 관한 신화’적 서사 구조에 가까웠다. 황우석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신’이었고,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동시대가 창궐한 ‘신화’였다. 마찬가지이다. 미디어는 김연아의 성취를 승리라기 보단 ‘차원이 다른 꿈의 실현과 세기사적 사건이 된 오늘을 맞이한 신화’적 서사적 창작물로 만들어가고 있다. 김연아는 ‘여왕’이어야 하고, 그의 연기는 동시대가 목격한 절대치여야 한다.

지나친 비유, 과도한 인상비평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단, 적개의 언어를 품지 않기에는 상황이 너무 비논리적이다. ‘신’은 어떠한 경우에도 논증의 대상이 못된다. 이유를 묻는 순간, 신은 사라져야 한다. ‘신화’에 대한 의심은 그래서 곧 반역이 된다. ‘신화’는 오로지 연유를 묻지 않는 열광만을 허락한다.

신문이 ‘신화’를 만드는 건 그래도 견딜 만하다. 열광하지 않을 여지는 존재하니까. 왜냐고 묻고, 싫으면 반역하고, 의심스러우면 안 보면 그만이다. 그런데, 지상파는 다르다. 100일간의 보도투쟁까지도 낯 간지럽고, 조중동 방송만은 안 된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중동이 방송을 하면, ‘사실’의 언어가 아닌 ‘신화’의 언어가, ‘객관적 해설’이 아닌 ‘주관적 해석’이, 공공의 이익이 아닌 사사로운 이익에 뉴스가 잠식된다는 것이었다. 김연아 보도에서 조중동과 지상파는 다른가? 스포츠에 한해서만은 저널리즘은 같은 것인가? 지상파 뉴스의 김연아 보도는 신화의 언어, 주관적 해석, 사익이었다. 완전히 정신줄을 놓은 뉴스였다. 고백하건대, 뉴스 그 자체에 적개심이 들긴 처음이었다. 차마, 눈뜨고 봐주기 딱할 지경이다.

고려대가 김연아를 낳고, 누가 키웠나?

어찌되었건, 시합은 끝났다. 물론, 김연아 보도가 끝난 건 아니다. 일요일 우승 이후 오늘까지도 김연아 관련 보도에 대한 열기는 전혀 식지 않고 있다.

▲ 고려대의 김연아 광고
“소진될 수 없어야 하며” 동시에 다양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소진되어야 하는” 영웅의 가련한 운명 탓일까, 난데없이 고려대가 똥바가지를 썼다. ‘민족의 인재를 키워온 고려대학교, 세계의 리더를 낳았습니다!’라는 문구의 동아일보 89주년 축하 광고가 ‘고려대학교, 김연아 낳았다’로 압축되어 네이버 뉴스 캐스트에 걸리면서, 흠씬 두들겨 맞았다. 2002년 월드컵 이후 흔하게 했던 짓이다. 얼마 전 박태환 때도 그랬다. 그리고 최근의 WBC까지, 유사한 레토릭, 비슷한 광고는 얼마든지 있었다. 한국사회에서 별로,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억울했겠다. 익명의 고려대 관계자는 항변했단다. “(박태환 등) 유명 선수를 둔 대학들도 다 이렇게 광고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유독 고려대 광고만 문제가 계속 불거지는지 모르겠다”고. 그 심정 이해 안되는 바도 아니다. 정체 불명의 네티즌의 공격, 언론이 독려했다. 자기들끼리 도랑치고 가재 잡고 오리발까지 내밀었다.

물론, 다 차려진 밥상 두고 독상 받겠다는 고려대의 심보도 고약스럽다. 하지만 고려대의 그 문구가 정말 대단한 문제라면 <한국인 기개 드높인 김연아의 쾌거>(중앙일보), <감동의 김연아, 코리아의 힘>(동아일보), <대한민국 브랜드 김연아>(문화일보) 따위의 일간지 사설 제목은 어찌할 텐가? 기개가 높아진 것 같지도, 힘이 생기지도, 같은 브랜드라고 느껴지지도 않는 ‘한국인’은 어쩌란 말이냐? 이건, 거의 범죄적 수준의 작문 아닌가?

▲ 동아일보 30일자 사설
언론의 광기, 광풍, 광문에 대한 답은 앞서 베컴의 사례에 있다. 영국 언론들이 베컴에게 행했던 방식, ‘처벌, 구원 그리고 찬양’의 질낮은 복제판이다. 성질 급한 한국의 언론들은 영웅의 운명 밖에서 날아드는 ‘접촉사고’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 아쉬운 대로 그러나 참으로 능동적으로 ‘고려대 뺑소니’ 사건을 스스로 창작해냈다. 다같이 천박해지니, 누굴 탓할 윤리도, 두려울 까닭도 없다. 한 달 만에 김연아를 ‘낳았다’는 고려대의 뻔뻔함이 극렬한가, 불과 이틀 만에 여왕에게 백태클을 가하고 마치 심판인 척 하면서 동시에 서포터인 척까지 하는 언론의 상술이 더 극악한가?

그리고 어제 그녀가 돌아왔다. 여왕의 귀환, 국가 원수급 입국 같은 자극적인 호들갑으로 저널리즘의 언어가 메워지고 있다. 아쉬울테다. 이제 wbc도 끝나고, 김연아도 휴식기에 들어갔으니. 이제 당분간은 대목도, 보도를 빙자한 공공연한 장사도 없다. ‘떨이’라도 하고픈 걸까? 중앙일보는 그녀와의 ‘시시콜콜한 인터뷰’를 냈다. 여왕님은 소박하게도 “경기도 소녀라 서울이 보고 싶다”며 ㅋㅋㅋ했고, “낳아준 학교(고려대)엔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낳았다’는 모교에 물을 먹였다.(그러니까 왜 광고는 동아일보에만 줘가지고….)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kbs 뉴스9이다. 어제 kbs는 김연아 사진 어깨걸이 문구로 ‘태극전사 응원’을 걸었다. 그 재빠름, 딱 사나워진 언론 환경만큼 탁했다.

흔한 말로 마무리 짓겠다. 미디어를 사회적 공기라고 한다. 공기는 하나의 성분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김연아를 위한, 김연아에 의한, 김연아의 호흡만 존재했던 방송, 김연아로 곧 한국을 상징하려는 신화에 재미들린 신문. 아시다시피 베컴의 훗날은 예상만큼 평탄하지는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상황, 김연아 본인에게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에게 한국이 김연아인가? 박찬호/박세리는 더는 아닌가, 얼마 전까지 한국의 ‘개조된 신체’였던 박지성/박태환은 이제 용도 폐기인가? 때되면 부활시킬 텐가?

모든 뉴스에는 ‘고유한 보도가치’가 있다. 스포츠 뉴스는 스포츠면에 두어라. 그걸 섣불리 깨지 마라. 한국 언론은 아직, 개인에 대한 집착을 세련되게 풀어갈 실력이 못되더라. 알잖은가, 맹목적인 집착이 대개 폭력이나 외설로 귀결된다는 것을. 언론이여, 김연아에게서 시선을 거둬라!

* 이글은 영국 러턴 대학 교수로 <대중 언론의 처벌, 구원 그리고 찬양 : 데이비드 베컴의 경우>를 쓴 게리워널의 글에서 전반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일부 표현을 참고,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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