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당위 속에서 희망의 불빛을 그려내고, 어떤 사람은 현실 속에서 우울한 어둠을 이야기한다. 사회 현상을 보고 글을 쓴다는 것은 대략 이 둘 중 하나로 귀결되곤 한다. 혹은 그렇게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독자들은 쉽게 양자택일하여 읽어내곤 한다. 그것은 의도치 않은 결과일 수도 있고, 반대로 전략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여기서 어느 것이 옳은가 하는 논란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인다. 관점에 따라서 상대적이기 때문에? 절대 아니다. 우리는 그보다 좀 더 심화된 생각을 해야 하는데, 어떤 지점에서는 뜨거운 선동을 할 필요가 있고 또 어떤 지점에서는 차가운 비판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비판을 통해 정세를 판단하고 거기에 뜨겁게 개입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3월 초에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산책자, 2009)라는 책이 발간됐다. 여러모로 작년 말에 나왔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 한겨레출판, 2008)와는 확연히 비교가 되는 책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어요.’라고 말하자 ‘그런데 촛불은 왜 껐대요?’라고 반문을 하는 느낌이다. 책 제목의 기원을 따져봐도 비교가 된다. <어둠은 빛을…>은 성경 구절을 인용한 것이고, <그대는 왜…>는 조용필의 노래 가사를 인용한 것이다. 앞의 책은 촛불을 성스러운 것으로, 뒤의 책은 세속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낭만화된 기억 혹은 ‘기념’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의 경우에는 기록지로서 자기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짓는다. 수개월에 걸친 촛불집회에 관한 도큐멘트 작업이 이 책의 ‘명시적인’ 목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목소리와 이미지 같은 것들이 책 전반에 포진해 있다.

“몇 사람들이 얼기설기 얽힌 기억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 촛불을 기록해 보자고 팔을 걷어붙인 것이 그리 유다른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기록의 목적은 망각을 피하자는 것이겠지요.”(박영선, 10쪽)

▲ 어둠은 빛을 이길수 없습니다, 한겨레출판, 2008
흥미롭게도 촛불을 기억하면서도 ‘기억의 낭만화’와 ‘기억의 망각’을 피하겠다는 것이 기획진의 문제의식이다. 그런데, 망각은 기억의 일종이다. 역으로,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것을 망각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아닌 이상, 우리는 필연적으로 망각할 수밖에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추상화를 통해 사유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과 망각은 상호 대립적으로 이해된다 하더라도 사실 둘은 길항적일 수밖에 없다. 기억은 망각을 전제로 하고, 망각은 기억을 전제로 한다. 둘은 서로가 없으면 기능할 수 없다. 마치 빛과 어둠의 관계처럼 말이다.

이번에는 책의 소제목들을 둘러보자. ‘예정된 분노’, ‘거대한 경이’, ‘분노의 촛불’, ‘창조적 저항’, ‘촛불의 영혼이 춤추다’, ‘마침표 아닌 쉼표’ ……. 촛불정국을 서사적으로 엮어낸 제목들이다. 거기서 우리는 피수식어가 아니라 수식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장에서 우리는 ‘분노’했고 ‘거대’했으며 심지어 ‘영혼’의 ‘춤’까지 ‘창조’했다. 뿐만 아니라, <한겨레> 사진부 기자들의 사진은 숭고한 느낌마저 갖게 한다. 거룩하고 성스럽다. 내가 켰던 촛불이 저렇게 장관을 이루었을 줄이야. 나와 함께 시민들의 표정이 저렇게 아름다웠을 줄이야. <어둠은 빛을…>을 보면 마치 우리가 역사의 중대한 고비를 훌쩍 넘긴 것 같다.

“태어나면서부터 시장원리를 철칙으로 배워온 사회구성원들이 마침내 ‘시장과 이윤이 넘보지 말아야 할’ 공공성 영역을 선언했다.”(오건호, 149쪽)
“수백만의 국민이 주권자로서의 분명한 자의식을 갖고 서울 한복판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거대한 하나를 이룬 것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처음이었다.”(신진욱, 168쪽)

기록을 담겠다고 했지만 이들은 기억이 주관화되는 것을 애써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어차피 ‘기억의 정치’라는 쟁점이 함의하듯이, 지배블록의 기억에 대항하는 정치라는 점에서 촛불은 반드시 저항의 의미에서 기억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독자들을 감상에 젖게 하고 선동하는 것은 무척이나 잘한 일이다. (<어둠은 빛을…>을 따르자면) 거기서 우리는 결집했고 연대했으며 공권력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그로 인해 촛불이 주춤하면서 꺼져버리고 말았지만 그것은 끝난 것이 아니라 잠시 쉬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 이들도 전제하듯이, 기억이란 “시간이 아주 조금만 움직인 경우에도 시간이 갖고 있는 어떤 절대성으로 말미암아 종종 신비화되곤”(10쪽)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신비화하고 싶지 않음에도 신비화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을 기록(혹은 기념)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고로 <어둠은 빛을…>의 작업은 촛불에 대한 일종의 탈신비화 작업일 터인데, 특정한 ‘성스러운 것’들이 (주로) 기억되고야 만다. 다른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망각된 채 말이다. 망각된 것은 아마도 ‘성스럽지 못한 어떤 것’일 게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어둠은 빛을…>은 결국 ‘어떤 것을 망각하기 위해’ 기억의 시도를 감행한 셈이다. 문제는 그 기억이 낭만화라는 요소와 결합하면서 더 이상 기록이 아니라 기념이 된다는 사실이다.

망각된 질문들

나는 이 책에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화려한 이미지나 수식어들이 아니라, 몇몇 필자들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그대로 노출한다는 점에 있다고 본다. 예컨대 한홍구 등이 광장과 거리의 대중들을 두고 “입만 열면 신자유주의 찾고, 자본주의 찾고, 구조적 위기를 찾는, 판에 박힌 운동권의 이야기하고는 너무나 달랐다.”(51쪽)고 말하는 동안, 몇몇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 논쟁[6월 11일 새벽 광화문 컨테이너 ‘명박산성’을 넘어설 것인가를 두고 펼쳐졌던 논쟁]은 촛불항쟁이 직면한 딜레마, 그리고 마지막까지 해결하지 못한 딜레마를 상징했다. … 과연 광장에서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전망은 만들어지지 않았다.”(이남주, 124쪽)
“우리의 학자들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촛불 정국에 솔깃한 대안이라도 내놓은 적이 있는가. 시민권이 발동되는 역사의 현장을 구경하고 감상할 줄만 알았지, 정확히 평가하고 다수가 수긍할 만한 지침이라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일이 있는가.”(차병직, 136쪽)

촛불에 대한 기록과 기념 속에서, 징후적으로 흘러나오는 이러한 쟁점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적어도 이 책의 몇몇 필자들, 예컨대 차병직이 말하는 것처럼 촛불에 대한 “과도한 상찬”이나 “칭찬”은 아닐 것이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는 바로 이 쟁점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여기서 촛불의 대중들은 새로운 저항주체라든가, 민주주의의 첨단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대중들이 성찰을 해야 한다고 비판을 한다. 이들의 논지를 따라가 보면, 촛불은 애초부터 꺼질 운명이었고 심지어는 환상의 측면까지 있었다. 공권력이 개입해서(혹은 수구언론이 공세를 펼쳐서) 촛불이 꺼졌다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문제의 원인은 대중 내부에 있었다.

“우리가 시도하려 했던 것은 무엇보다 어떻게든 지금 우리는 어떤 식으로 정치를 사유하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조망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사유하고 반성하고 있는가를 묻는 일보다 우리에게 더 절실한 일은 없다고 믿는다.”(서동진, 13쪽)

그리하여 촛불은 기록이 아니라 비평의 도마 위에 오른다. 예컨대 “촛불집회의 전개 과정에서 놀라운 점은 그토록 많은 사람이 거리에 나올 수 있었던 점이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서 저항을 하였음에도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담론도 체계적으로 형성되지 못했는가 하는 점”(백승욱, 41쪽)에 있다. <그대는 왜…>는 촛불을 기념하기보다는 끝없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마지막까지라도 가질 법한 모든 환상을 빼앗아버린다.

▲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당대비평, 2009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해답이라는 것은 질문에 대한 비판에서만 구해질 수 있고, 그 질문 자체를 부정함으로써만 해결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대는 왜…>는 종래의 질문들을 의문시하는 전략을 취한다. 질문에 대한 질문. 가령 ‘촛불 정세에서 대중을 어떻게 저항주체로서 해석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것이 일종의 부당전제일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 대중은 주체적으로 자기 전화를 수행하지 못한 ‘경계 안에 갇힌 존재’였다고 비판한다.

<그대는 왜…>를 좀 더 따라가보자. <어둠은 빛을…>이 촛불 속에서 아버지(국가)가 자식들을 버림으로써 ‘연대’하게 된 광경을 보았다면(김현진, 163쪽), <그대는 왜…>에게 그 장면은 그 자식들이 자기 신체상의 안전과 이익을 넘어서 서로 간의 경계를 허물지 않았기 때문에 연대라 일컬어질 수 없다. 촛불은 연대의 정치가 아니라 판타스마고리아가 결계를 친 ‘욕망의 정치’에 불과했다(이택광, 55쪽). 그런 의미에서 촛불의 대중들은 정치 이상의 (운동)정치로 나아가지 못하고 “안정과 질서를 시민사회의 으뜸으로 치는 ‘치안’의 체현자들”로 머물게 되었다(이택광, 65쪽).

운동으로서의 정치와는 다른 욕망의 정치, 즉 치안으로서의 정치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김정한이 지젝을 빌려 하는 말처럼, “몫이 없는 자들이 치안 질서를 방해하거나 치안 질서를 향해 끊임없이 불가능한 요구를 제기하는 것은 스스로 주인이 되는 대신 주인을 향해 히스테리적으로 도발하는 데 불과하다.”(147쪽) 촛불의 대중들은 분노 속에 영혼 깊이 저항하며 사실상 이렇게 절규하지 않았던가. ‘(국가라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배제와 폭력을 기억하자

촛불 정국의 실체는 ‘직접민주주의’ 이전의 ‘직접행동’(백승욱, 44쪽)이었으며, 그 행동이란 “부르주아를 향해 쾌락의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중간계급의 행동”(이택광, 67)이었고, 그 촛불은 결국 “한국 중산층의 자기 표현 양식”(은수미, 232쪽)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그 중간계급에게 있어 “가까울수록 촛불은 좀 더 빛나며 거리가 멀어질수록 촛불은 어둡다.”(은수미, 232쪽) 게다가 “인위적인 이데올로기적 경계를 무안하게 만들며 돌봄 노동, 양육 노동을 해왔던 여성들의 훈련된 생명 감수성”(김영옥, 214)은 국민이라는 상상적인 통합체에 의해 별다른 의미화 과정을 거치지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랜드 노조부위원장의 말은 의미심장한데,

“촛불은 끝내 홈에버 매장으로 오지 않았다.”(은수미, 221쪽 재인용)

단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는 촛불 정국에서 나타난 배제의 문제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배제는 아버지가 자식을 버리는 배제가 아니라, 아들이 딸을 그리고 장남이 막내를 버리는 배제이다. 중간계급이 아닌 하층의 사회계급은 쉽사리 거리로 나올 수가 없었다. 초과노동을 감내해야 하는 비정규직은 거리가 아닌 일터를 지켜야 했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하더라도 촛불시민이 표상하는 현실의 운동 내부로 진입하기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실제로 촛불은 해방의 공간이었던 만큼, 억제의 공간이기도 했다.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었던 만큼, 망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그런 공간이었다. 언젠가 만났던 10대 학생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금 집회에서 촛불소녀라는 캐릭터 있잖아요. 근데 그 캐릭터가 굉장히 문제가 많거든요. 일단 그 캐릭터 모습만 보더라도 귀밑 5cm와 단정한 교복을 하고 있어요. 그게 어른들이 10대들한테 요구하는 모습이거든요.”(엠건, 청소년활동가, 『문화사회』 3호 중에서)

통념적으로, 우리는 ‘폭력과 비폭력’이라는 기로에서 촛불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고 믿어 왔다. 집회에서 폭력을 옹호하는 일부 시민에 의해 대중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 쟁점을 끝내 풀지 못한 까닭에 촛불이 쉬고 있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폭력’이 사실은 이미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도시의 하층민들, 이주노동자들, 10대들, 비정규직들은 2008년의 촛불 정세를 과연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만약 진실이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가 거기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면, 촛불이 꺼진 건 사실 대중들 내부의 균열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불편한 기억들을 끄집어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촛불을 다시 한 번 켠다면, 그땐 정말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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