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아는 언감생심이다. 열심히 CSI를 찾아보는 편도 못된다. 기본적으로 시리즈 외화물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진득하니 한 프로그램에 착종하기보단 채널 사이를 재빨리 오가면서 보고 넘기고를 반복한다. 1시간에 많게는 수십 적어도 서너 개의 프로그램을 보긴 했는데, 뭘 봤는지는 뒤섞이고, 결국 그래도 보긴 본, 뭐 대충 이런 형태의 TV 시청 습관을 갖고 있다. 그래도 주로 즐겨 보는 채널을 꼽자면, ESPN과 온게임넷 정도이다.

CSI에 대한 자잘한 평가는 않겠다. 워낙에 유명한 시리즈이다. 명실상부 전문가라고 할, 그리섬의 직관과 새라의 직감을 두루 갖춘, 내공의 깊이를 알기 힘든 숱한 고수들이, 시리즈의 확실한 증거가 되어, 거의 실시간으로 현장을 지키며, 닥본사 이상의 어떤 행위들을 수행하고 있는데, 나는 단지 지상파와 케이블을 오가며, 우연찮게, 얼핏얼핏, 도시별 특성이 다르다는 정도를 겨우 이해하며, 수사극의 장르적 재미를 뛰어넘는, 어떤 에피소드들에 경외하며, 남들 뉴욕 볼 때 겨우 마이애미보는 식으로 쫒아갈 뿐이다. 헌정을 바칠 충성심이 내겐 없다. 내게 그 시리즈가 각별해진 것은 오히려, 시청의 열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아주 특별한, 개인적 기억 때문이다.

우선, 첫 번째는 동거인이 그 시리즈를 격하게 아끼는데, 그녀의 꿈은 다음 생에서는 기필코 과학수사요원이 되는 것이다. 허무맹랑한, 소박하고 또 부질없는, 그러나 현생의 태생적 비루함을 거뜬히 뛰어넘는 꿈이다. CSI 즉, 과학수사란 한국적 상상력에선 도저히 자생 불가능한 어떤 전문성에 대한 갈구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수사하면 아직도, 조건반사적으로 <살인의 추억>에서 우뢰성을 뱉으며 두발 날리던 송강호가 떠오른다.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야 뭐야” 그이가 바로 오늘 우리가 아는 경찰이고, 어제 노종면 위원장을 구속한 이들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2006년 여름, 방송의 월드컵 싹쓸이 편성을 규탄할 때의 일인데, ‘집 나간 이성을 찾습니다’란 제목의 <월드컵 반대 게릴라 행동>이란 걸 하고 있었다. 당시, 전체 방송 편성 시간의 60% 이상이 월드컵 관련 프로그램으로 도배됐었다. WBC를 전하는 오늘의 TV도 별반 다르진 않다. 착란에 빠진 TV를 도저히 참고 봐줄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방송 3사를 돌아가며 릴레이 1인 시위를 했었다. 역시, 소박하고 또 부질없는. 그러나 평화로운 꿈이었다.

토고 전을 앞두고 MBC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때였는데, 갑자기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도심 복장의 전형성을 거부하는 일군의 자유로운 무리들이 1인 시위를 하겠다며 그야말로 ‘자발적’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녀들은 말 그대로 자발적인 1인 아니 다인 시위를 했는데, 손수 제작해온 피켓의 문구가 압권이었다. ‘CSI 결방한 MBC는 각성하라!’, ‘CSI 볼 권리 박탈하는 지상파를 규탄한다!’ 당시 MBC만이 유일하게 지상파를 통해 CSI를 방송하고 있었는데, 월드컵 시즌 동안 결방됐었다. 뭐랄까, 세상의 지평이 달라진 인식론적 충격이었다. 누군가에게 월드컵은 CSI만 못한 걸 수 있다는 걸, 월드컵 반대를 한답시고 나섰음에도,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각설하고, 어제 참 오랜만에 CSI를 ‘닥본사’했다. 물론, 동거인 때문이었다. 어제 본 CSI는 새로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즌9의 여섯 번째 에피소드였다. 제목은 ‘코리아타운 총격 사건’. 물론, 전혀 낯선 플롯은 아니었다. 라스베거스 코리아타운에서 대낮에 총격 사건이 벌어져 한국인 두 명이 죽는다. 하지만 범행 현장에서 사건을 목격한 한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경찰에게 협조하지 않는다. 그리섬은 탄피조차 찾을 수 없는 현장에서 혈흔이 많이 튄 아동용 선글라스를 하나를 발견한다. 선글라스의 주인은 사건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런데 아이는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피살자들은 다름 아닌 그 아이의 엄마와 삼촌으로 밝혀진다. 뭐 대강, 이런 얼개이다.

몰입해 들어갔다. 게다가 이번 에피소드의 장소는 듣는 것만으로 친숙해지려고 하는, 코리아타운이었다. CSI는 무조건 범인을 잡는다. 그것도 우격다짐이 아닌 정교한 추적의 과정을 통해. 모든 수사극의 평범한 진리를 존중할 만한 짜임새로 이어 온 것이야 말로 아홉 시즌을 버텨온 CSI 시리즈만의 역동적 생명력이다. 그리섬의 지휘 아래 일단, 널부러진 증거들을 모으고, 버려진 증거들을 직조하여 추론해 들어간다. 지배적 경로는 과학, 의존적 경로는 심리학이다. 루미놀 반응을 찾거나, 탄피를 분석한다. 기초적 데이터가 모이면, 증거 너머로 엿보이는 관계성 같은 것들을 바탕으로 행동 경위와 목적을 심리적으로 판정한다. 이것이 사건을 풀어가는 CSI의 일반적 방법론, 즉 과학수사였다. 그 전까지는.

그런데 어제 에피소드에선 과학수사의 방법론이 흔들렸고, 내가 알던 그 동안의 CSI와는 사뭇 달랐다. 피살자가 한국계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 여성이란 이유로, 창녀라고 확정했다. 흡사 한국 경찰이 HIV 보균 택시기사를 잡자마자, 범죄 사실을 확정짓기 전부터 ‘변태’라고 확정지은 것처럼. 그러곤 범인을 갱으로 일단 단정짓고, 시작했다. 그건 과학수사의 방법론이 될 수 없다. 증거와 사실이 확정되기 전에 주관적 해석부터 시작하는, 낯익은 진부함은 CSI 이전의 그저 그렇고 그런 시시한 헐리우드 범죄 수사극에서 흔히 답습되던 전형성이었다. 결정적으론, 한국 경찰이 주로 사용하는 수사법이다. 이런 식의 수사라면 CSI와 다른 수사대들을 갈라 칠 아무런 이유가 없어진다. (탄피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난잡했던 현장에서, 선글라스가 온전히 발견된 억지스러움은 따로 말하지 않으련다.) 이후의 전개도 마찬가지로 이전의 CSI와는 사뭇 달랐다.

한 마디로, 어제의 에피소드는 엉성하고 무성의했다. CSI가 범인으로 단정하고 추적하던 갱단의 이름이 KD, 즉 ‘깡패 드래곤’이었던 점도, 그녀가 성룡 시술 이후 한국에서 대유행하는 쌍꺼풀 수술을 했던 것이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다는 설정도, 한국인은 차라리 갱에게 상납을 했지 절대 미국 경찰에게 무엇을 말하지 않는다는 가설도,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코리아타운의 디테일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범인을 확정짓는 장면까지. 모두 기존의 CSI 과학수사와는 거리가 먼 <살인의 추억> 스타일의 미장센과 직감 수사였다.

한국 사람에겐 한국 스타일의 수사를 한 것일까? 그 외 특별한 까닭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코리아타운’이라고 하는 구체성에 기인하는 차이 같다. 맞다. 한국은 여전히 그렇게 낙후된, 몇 개의 고정적 편견을 갖고 있는 이미지이다. 우리끼리 무역 규모가 세계 몇 등이네, 올림픽과 월드컵을 동시 개최한 몇 안 되는 나라이네, 세계를 경악케 했네, 하고 떠드는 것이지 여전히 바다 건너 사람들에겐 아시아는 거대한 중국과 작지만 강한 일본 외엔 변별하기 어려운 나머지들일 뿐이다.

그 확고불변의 처절한 우월감에 낙담할 생각은 없지만, 한국인이 미국 사회의 하층 계급으로, 쌍꺼풀과 같은 몰이성적 유행이나 따르며, 대개 음주운전 따위로 실형을 살고, 같은 국적의 사람들을 강탈하고, 아이를 임상실험의 대상으로 거래하며, 타민족에겐 지극히 배타적인 무리로 묘사되는 것을 보는 것도 고역이다. 그 왜곡된 재현의 반복이 무엇 때문인가, 물으려다, 문득 섬뜩해진다. 가슴이 아려온다. 그건, 아마도….

문득, 이 모두를 미리 내다보신 어느 한 분이 떠오른다. MB는 얼마 전에 친히, 직속으로 국가브랜드위원회라는 자문위원회를 만들고, “정부가 목표로 하는 선진일류국가는 단순히 1인당 소득이 얼마냐 하는 것보다 모든 분야에서 선진일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참고로, 50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가브랜드 조사결과에서 한국은 33위를 차지했다.) 당혹스럽다. MB와도 생각이 일치할 수도 있음이, 부끄럽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름 아닌, 국가 브랜드란 말인가.

모든 분야에서 선진일류 수준에 도달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그런 허무맹랑하고 또 부질없는 나부랭이 같은 소리 말고, 구체적으론 쌍꺼풀 만능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꼼꼼한 머리와 차가운 가슴의 대명사인 그리섬 반장조차 한국인 하면 응당 어떠하다는 편견은 어쩔 수 없었다. 한국적 상상력에선 사유할 수 없는 이성주의, 어떤 이들에겐 월드컵에 비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시리즈, 과학과 심리학을 날개로 하는 정교한 범죄 수사극인 CSI 조차, ‘코리아타운 총격 사건’은 과학 수사 하질 않는다.

하긴, 또 딱히 억울할 건 뭐람. 사법부가 정권의 하층 계급으로, 기자 구속과 같은 몰이성적 유행이나 만들며, 대개 표적 수사를 통해,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가치들을 훼손하고, 재판을 체제친화의 대상으로 거래하며, ‘상식’에겐 지극히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경찰, 사법부 그리고 그 윗선의 누군가들까지, 알량한 수사권을 가진 그 모두들에게, CSI 시즌9 episode6 ‘코리아타운 총격 사건’ 편을 권하고 싶다. 당신들 한 마디로, 엉성하고 무성의하다. 그러니 저 멀리 타국의 코리아타운에서나, 오늘 여기에서나, 우리가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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