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언론시사 현장을 찾으면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자고 나온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확할 정도로 <사냥>과 <트릭> 같은 한심한 개봉 예정작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눈에 띄는 영화가 둘 있었다. 하나는 외화 <언더 워터>고 다른 하나는 한국 영화 <부산행>이었다. 전자는 상어에 물린 여대생이 상어와 사투를 벌이는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흡입력 있는 연출로 세련미를 뽐내는 외화였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부산행>은 사람보다 더 날렵한 좀비들과의 ‘투쟁기’가 다가 아닌 영화다. 좀비의 행동 양태는 브래드 피트의 <월드워Z> 전과 후로 구분된다. <월드워Z> 이전 좀비의 동작이 느릿느릿했다면 이후부터는 육식동물이나 사람을 민첩하게 사냥하고 도륙하는 좀비로 좀비의 행동 양태가 변모했는데 <부산행>의 좀비 역시 <월드워Z>의 좀비 패턴처럼 사람보다 빠르고 강력하게 묘사된다.

영화 <부산행> 스틸 이미지

우선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건 한나 아렌트가 언급한 ‘악의 평범성’이다. 이 영화를 보면 영화 사상 처음으로 ‘좀비 고라니’를 만날 수 있다. 트럭에 치인 고라니는 피를 흘리며 죽어야 정상이다. 한데 고라니는 꿈틀대며 일어섰는데 까만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죽어야 할 생명체가 되살아났다는 건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암시한다.

석우(공유 분)의 직업은 펀드매니저다. 주식 거래를 함에 있어서 그냥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차익을 남기는 직종이다. 로드킬 당한 고라니가 되살아난 건 한 화학 회사에서 새어 나온 화학 물질이 자연에 퍼져 일어난 재앙인데 이 화학 회사는 석우 및 그의 증권회사가 벌인 작전이 아니었으면 상장 폐지되었을 회사다.

즉 석우 및 그의 부하 직원들이 벌인 작전 덕에 다시 살아난 것인데 다시 살아난 이 화학 회사는 유출된 화학물질로 말미암아 한국 땅에 좀비 재앙을 퍼트린 원흉이 된다. 화학 회사의 작전에 개입한 석우의 부하 직원이 석우에게 죄책감을 토로하는 통화 내용은 증권 세력이 작전을 벌일 당시에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다가 일이 크게 벌어지자 죄책감을 느끼는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화 <부산행> 스틸 이미지

<부산행>에서 주목할 부분은 국가의, 혹은 집단의 목소리에 순응했을 때 개인이 맞이하는 ‘비극’이다. 좀비로 한국 사회가 시스템 마비되어도 이를 국가적 재난 상황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환원주의’적인 방식에 따라 단순 폭동 혹은 과격 시위로 축소하는 매스컴의 조작을 영화 안에서 관찰할 수 있다. 만일 대중이 매스컴이 전하는 왜곡된 정보를 고스란히 따르고 순응했다면 십중팔구 그는 좀비로부터 피난하거나 도망가지 않아 좀비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를 세월호 사건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세월호의 방송은 배가 가라앉는 상황에서도 구조될 때까지 선실 안에서 침착하게 대기하고 있으라는 거짓 방송이었다. 이는 영화 속에서 대중에게 좀비가 창궐하는 국가 재난적인 상황을 단순 폭동으로 거짓 치환하는 혹세무민과 다름없다. 세월호의 방송을 진실로 믿다가 바닷물에 수장된 세월호의 비극이 영화라는 가상 가운데서 재현되는 것이다.

방송이 날조한 거짓 정보에 순응하면 좀비가 되고 마는 영화 속 현실은 세월호의 방송만 믿고 선실에 그대로 있다가 참극을 당한 세월호의 비극을 우회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국가 혹은 집단의 프로파간다를 액면 그대로 믿지 말라는 영화 속 메시지가 세월호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재난 대처 시스템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노출하는 방증임과 동시에 시스템의 프로파간다보다 나 자신의 판단을 우선시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한국 사회의 ‘불신지옥’을 보여주는 방증임에 틀림없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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