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일자리를 나눠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초임자의 임금을 깍는다? ‘잡 셰어링’이란 외래어 캠페인이 새마을 운동 수준으로 행해지고 있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이젠 개념어 수준이 됐지만, 여전히 한쪽에선 한국 초임자의 임금이 일본 보다 높다고 한다. 노조가 사측을 격하게 걱정했다는 어느 노조의 이야기가 조중동에 연일 대서특필 되고 있기도 한다. '경제위기 극복=잡 셰어링=초임자 임금 삭감'으로 짜여진 프레임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정치, 경제, 사회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 '아햏햏'한 일에 대한 노련한 분석을 20대 논객 중 한 명인 한윤형(yhhan.tistory.com)씨에게 부탁했다. <편집자>

우리가 기업을 경영하는 처지라고 가정하고 한번 생각해 보자. 어디어디에 돈이 들어갈까? 설비비를 빼고 생각하면 인건비와 원재료비, 그리고 부지매입이나 임대비용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환율 때문에 원재료비 가격이 상승하고 국가에서 부동산 거품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상황에서 그가 비용절감을 위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당연히 임금을 낮추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 ‘합리적인’ 판단이다.

물론 당장 경영하기 힘들다고 임금을 낮추기 시작하면 내수경기가 침체되고 결과적으로 다시 기업경영이 힘들어지는 악순환 구조가 생긴다. 그러니까 국가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임금은 어떻게든 유지하게 하고 부동산 경기부양에 기대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고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하지만 기업인들 말을 다 들어주는 것이 나라 잘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국가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기업인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당장 빼먹는 곶감 맛에 취하게 될 것이다. 수출기업을 중심으로 고도성장을 일구어 냈던 이 나라에서는 내수경기가 중요하다는 인식도 별로 없으니까, 모두 허리띠 졸라매고 외국에 물건을 많이 팔아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럼 인건비를 줄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어디에 있는 누구의 임금을 줄여야 할까? 모든 포털사이트의 덧글족들이 강렬하게 혐오하는 ‘귀족 노조’? 그럴 수 없다. 그들의 밥그릇에 있는 밥을 퍼내려면 기업인도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면 최저임금을 간신히 받는 비정규직이나 하청업체 노동자들? 이것도 안 된다. 사회의 지탄도 문제가 될뿐더러,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의 임금을 깎는다면 노동력 자체가 재생산되지 않는다. 더구나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잔업이 사라지면서 이미 실질적인 임금 감소 효과를 경험 중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 임금을 깎아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그 절묘한 해답은, 노동조합에 들어올 예정이지만 아직 입사하지 않은 이들, ‘귀족 노조 예비군’들이다. '귀족 노조'에 대한 사회적인 반감도 활용하고, 그러면서 현존하는 ‘귀족 노조’의 반발도 피해가며, 다른 이들에 비하면 비교적 월급이 많았으니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짭짤하다. 그래, 목표는 정해졌다! 이제 대충 정당화 논리를 만들어야지. 원화와 엔화의 격차가 가장 적었던 시절의 데이터를 가져와 일본과 비교해보자. 그리고 한국의 통계는 모든 종류의 수당을 다 합쳐 월 평균 급여를 계산하고, 일본의 통계는 기본급을 표시한 것을 가져와 한국의 대졸초임이 심지어 일본보다도 훨씬 높다고 우겨야지. 이렇게 대충 통계를 만들어도 어차피 조중동은 그것을 ‘진실’로 만들어줄 테니. 그리고 그렇게 줄인 돈으로 청년인턴 사원들 몇 명 더 고용한다고 광고해야지. 이 얼마나 탁월한 전략인가. 아아, 이 위대한 고통분담. 금모으기 이후의 최고의 국난 극복 운동이로다!

내가 살아가는 나라의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이 대충 이런 식이다. 대원군이 양반들에게 세금 내라고 했더니, 지들이 부리는 노비들에게서 돈을 걷어서 내게 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대기업에게 고통분담 하랬더니, 대사노(大社奴)들에게 고통전가를 하고 자빠졌다. 외국의 ‘잡 셰어링’ 사례처럼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 정규직을 추가로 고용하는 거라면, 노동자 계급의 연대전략이 될 수도 있고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경영혁신 전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 앞으로도 대사노들의 노동시간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자본가들은 ‘고용 유연성’은 알아도 ‘노동시간 유연성’은 모르는 경직된 종자들이니까. 시킬 수 있는 한도까지 시킨 후 그래도 일이 안 될 때에나 다른 이를 고용할 생각을 할 것이다. 그렇게 아낀 비용으로 청년 인턴사원을 얼마나 늘릴까? 대사노와 비슷한 강도로 일하고 100만원 남짓 받는 이 대사노 2군들은 무슨 업무능력을 쌓아 다른 곳에 취업하게 될까?

▲ 2월 28일자 한겨레 8면 기사.
어쨌든 정부나 기업에서 선전하는 대로만 이 제안이 작동한다면 뭔가 미덕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대졸초임을 깎자는 조류가 ‘대세’가 되면서 기존의 노동조합도 고통분담을 결의하고 임원진들도 월급을 반납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기는 있다. 사례별로 상황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누가’ 그것을 통제하느냐다. 앞서 보았듯 이건 관련 당사자들이 쇼부를 쳐서 생긴 일도 아니고 자본가 입장에서 그냥 가장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간 것이다. 물길이 둑의 가장 허약한 부분에 몰려 둑을 터트리는 것처럼 한국 사회가 겪는 경제위기의 고통이 한 지점에 몰린 것이다. 더구나 과연 ‘초임 삭감’의 물결이 상대적으로 월급이 많던 대기업/금융권에만 그칠지에 대해서도 속단하기 어렵다. 정당화를 할 때엔 그런 기업들의 임금만 얘기하지만, 공무원 임금삭감까지 얘기하는 것을 보면 결국에는 전 기업으로 파급될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메뚜기의 간만 떼어먹는다고 얘기하다가 결국에는 벼룩의 간도 빼먹는 꼴이다.

이 사태의 직접적인 피해자라 볼 수 있는 20대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합의는커녕 발언도 한 바가 없고, 앞으로도 사태에 개입할 힘을 가지기 어렵다. 취업준비생들은 더 좁아진 바늘구멍을 뚫기 위해 아둥바둥하고 대사노든 대사노 2군이든 회사 안에서 가장 약자의 입장에 처하게 될뿐더러 노동강도가 너무 세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도 않는다. 소사노(少社奴)나 진짜 주인이 누군지도 잘 모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 문제와 자신이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통제할 이해당사자 주체가 없는 이 정책은, 정말로 원래 취지만큼이라도 고통을 분담하는 쪽으로 흘러갈까? 이런 질문은 우문에 가깝다. 임원진의 감동적인(?) 고통분담 동참 사례들 뒤에 숨겨져 있지만, 이미 ‘잡 셰어링’을 빙자한 단순한 임금 삭감의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정책은 명백하게 '고통분담'이 아닌 특정 세대 젊은이들에 대한 '고통전가'를 의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노동시장에 늦게 나와서 좌절하는 20대가 분노할 대상을 찾는다면, 그것은 정부나 기업보다는 노동계일 수밖에 없다. 노동계는 그들이 장차로 대변해야 할 예비 노동자들의 권리를 실탄 하나 쏴보지 않고 정부와 기업에게 양도했다. 왜 더 나쁜 놈들을 때리지 않느냐는 질문은 우문이다. 한국 국민이 외국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우리는 그 부당한 대우의 가해자가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방치한 우리의 국가를 탓한다. 흔히 그런 정서를 가질 뿐더러 그걸 상식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20대가 노동계에 대해 항의해야 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마땅히 책임져야 한다고 기대되는 상대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계, 특히 민주노총은 자신들은 이미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항변할 것이다. 사실 민주노총은 연일 기자회견을 하면서 위에서 내가 말한 것과 같은 ‘잡 셰어링’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 형식적 제스처로는 부족하다. 냉정하게 바라볼 때 민주노총의 반발은 대졸 초임 문제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기존의 노동자들에게 미칠 수 있는 파급효과 때문이다. 민주노총의 그러한 이기주의는 정당한가? 하긴 “기업의 목표는 이윤추구. 그러니까 우리에게 다른 거 요구하지 말라능!”이라고 언제나 외치는 정부와 재계가 민주노총에 대해서만은 “너희들은 이익집단이니 짜져라!”고 요구하는 걸 보면 여기나 저기나 이익집단인 건 마찬가진데 뭐 어쩌라고,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민주노총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분명 ‘자연스럽다’. 전경련이 노동자 임금 한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눈에 핏발이 선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듯. 하지만 민주노총의 행동은 어떤 종류의 공익에 비추어 볼 때 ‘정당한’ 일은 아니다. 세계에서 노조 조직률이 가장 낮은 편에 속하고 게다가 그 쟁의의 성과물도 단지 조합원에게 한정시키는 식으로 디자인된 한국의 ‘민주노조’는 전체 노동자의 10% 미만인 3-40대 대기업 남성 정규직을 위한 굳건한 성채를 쌓았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조의 자구적인 노력들이 어떤 식으로 벽에 부딪혀 왔는지를 우리는 안다. 그러한 민주노총이 새로운 방식으로 변하기 위해서라도 외부의 자극은 필요하다.

그러므로 결국 20대는 노동계에게 스스로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잡 셰어링’ 논의가 횡행하는 것은 노동계가 자신들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20대들의 권익을 포기한 결과로 해석되어야 한다. 적어도 20대 일반이 이 문제에 대해 그런 식으로 분노할 때에만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많은 20대들은 적어도 네이버 덧글에서만은 민주노총을 ‘테러’하고 있다. 그 분노를 좀 생산적인 것으로 끌어내야 한다. 민주노총에 대한 분노가 ‘먹고 살만한 놈들이 지랄하네.’라는 막연한 반감에서 ‘왜 우리는 대변하지 않는 거야?’라는 문제의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기업인들과 어떤 상식인들은 노조가 10%만 있어도 나라가 이렇게 힘든데 노조 조직률이 90% 쯤 되면 모두가 노동귀족이 되고 나라가 결딴날 거라고 생각한다. 사태의 진실은 정반대다. 노동조합이 노동자 전체를 대변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 노동자를 위한 특권의 성채가 되는 것이다. 노동조합과 기업집단 간의 합의가 사회통합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뭐라고 요구해야 할 것인가? 1) 노동시간 감소를 통한 실질임금 삭감 2) 삭감된 임금만큼 새로운 정규직 일자리 창출이라는 현재까지 나온 ‘잡 셰어링’에 대한 비판 논의에 덧붙여 3) 신입사원과 노조원에 대한 동등한 비율의 임금 삭감을 추가하면 되겠다. 3)은 1)의 원칙이 확립되면 사실 자연스럽게 따라 나와야 하는 원칙이다. 그것을 명시하는 것은 민주노총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조합원 외부의 사람을 대변하라는 요구의 확인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엔 노조 바깥의 노동자나 예비노동자를 대변할 수 있는 제도적 기제는 없다. 제도 바깥의 이들이 민주노총을 향해 성질을 부리고, 민주노총이 그 정당한 성질머리를 수용하여 공익의 이름으로 정계와 재계를 압박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바람직한 길이다. 이것은 민주노총이 망하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몰락을 예고하는 썩은 동앗줄 사이에 섞여있는 유일하게 튼튼한 동앗줄이다. 민주노총이 20대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여겨질 때, 얼마나 많은 결과를 만들어낼 것인가? 그러므로 20대들은 민주노총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타격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20대가 스스로 나섰을 때 얼마나 많은 조소가 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간다. ‘대사노’가 될 만한 ‘스펙’의 젊은이가 민주노총을 질타한다면 사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다른 젊은이들에 비해 형편이 좋은 친구가 그래서는 쓰나. 저기 가서 찌그러져 있어라!” 영 ‘대사노’가 되기 힘든 ‘스펙’의 젊은이가 외친다면 그네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왜 당신 일도 아닌 일에 나서고 난리냐? 누구 어디 이념집단의 사주를 받은 게 아니냐?” 이런 식의 냉소주의적 반응에 대해 나는 냉소주의자들의 어투를 차용해서 딱 한마디만 한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리고 어떤 행동도 무의미하다는 회의주의를 떨쳐버리며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잃을 것은 네이버 악플러의 족쇄 뿐이며, 얻을 것은 우리의 이해를 대변하는 새로운 조직의 탄생이다. 20대들이여, 우리의 분노를 해방하여 민주노총을 타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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