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 문법으로 하자면 ‘어느 여성의 죽음’ 정도로 제목을 정하는 게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여성들’을 호명하였다. 지나치듯 보는 한 건의 사건 사고가 아니라 공동체라는 집단의 비극임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강남역 묻지마’란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링크를 눌러본다. 남녀공용화장실에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은 젊은이에 대한 추모의 물결을 또 본다. 한편의 감격과 작은 걱정이 동시에 머릿속을 채운다. 엉망진창이 돼버린 덧글란을 들여다 본다. 남성들의 망상에 가까운 폭력적 표현들에 눈쌀을 찌푸린다. 언론이 제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세태를 언론 스스로가 돌아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사건은 ‘여성혐오’에 의한 것인가? 기자들은 섣부른 판단을 경계하면서도 어느 부분에 있어선 또 곧잘 쉽게 단정한다. 그러니 한 번 따져볼 필요는 있다. 어느 언론은 범인이 조현병 등을 앓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범인은 거짓말을 했을 수도, 그저 적당한 이유를 아무 것이나 둘러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 의한 것이든 ‘여성 일반’에 대한 적의가 작용하였다면 이를 여성에 대한 혐오범죄로 규정하기에는 충분하다.

많은 사람들이 언론의 성의 없는 제목 짓기에 반발하였다. <“여자들이 무시해” 목사 꿈꾸던 신학생 묻지마 살인> 따위와 같은 제목은 특히 강한 비난의 대상이 됐다. 사람들의 주장은 이 기사의 제목이 범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간 언론들의 행태를 고려했을 때는 물론 이 역시 여성혐오의 결과일 수 있으나, 그것이 인구에 회자되는 대로의 형식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은 짚지 않으면 안 되겠다. 대다수의 기자들은 기사를 남들보다 빨리 써내고 싶어 한다. 만일 이미 1등을 빼앗겼다면 다른 기자들이 보도하지 않은 사실을 하나라도 더 기사에 넣어야 한다. 대개 이런 종류의 사건에 대한 기사는 경찰의 정보 제공에 크게 의존한다. 그리하여 어느 기자는 경찰이 브리핑한 내용 중 범인이 신학대에 다녔다는 대목을 기사에 넣었고, 데스크는 <역삼동 공용화장실서 살인사건, 경찰 하루 만에 범인 검거>와 같은 드라이한 것보다 훨씬 잘 읽힐만한 제목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였을 것이다.

‘묻지마 살인’이란 어휘는 범인이 피해자와 금전이나 원한에 얽힌 관계가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별 고민도 없이 끌어왔을 것이며 ‘여자들이 무시해’란 표현도 ‘죽일 만 했다’는 의미를 싣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살인 동기를 추적하기 위한 하나의 단서라는 단순한 판단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여자들이 무시했다”는 진술과 살인의 장소가 ‘화장실’이라는 점은 추가적인 성범죄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출구에 '묻지마 살인' 사건 피해자 여성을 추모하는 추모글이 남겨져 있다. (연합뉴스)

요즘 분위기로 보면, 이제 “쉴드 치는 거냐”는 반응이 나올 법 하다. 이런 제목 짓기가 바람직하다는 게 아니다. 범인이 굳이 신학대에 다녔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학대생들이 다른 전공에 비해 여성혐오적 범죄를 더 많이 저지르는지 여부를 분석한다거나 또는 이 사건이 신학 그 자체와 관계가 있는지를 논하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심지어 범인이 ‘목사를 꿈꿨다’는 것은 그저 추정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언론의 선정주의다. <범인 A씨는 전직 신학생…‘헉’>과 같은 작명이 이를 방증한다.

선정주의는 ‘일반적 인식’에 호소하는 전략이다. 우리가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일반적 인식’에는 대개 그 시대의 기득권적 욕망이 반영돼있다. 선정주의의 속성은 이 욕망을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언론이 내는 인터넷판 기사의 수많은 ‘헉’들이 대개 남성중심적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기사 제목에 반발하는 목소리는, 그것이 가진 어떤 성급함에도 불구하고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특히 ‘묻지마 살인’을 ‘여성혐오 범죄’로 바꾸어 부르자고 제안하는 것은 앞으로 언론이 사태를 보다 섬세하고 정확하게 보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언론들은 앞서의 선정주의와 이로 인한 성평등적 관점의 부재 때문에 수많은 ‘제목 참사’를 일으켰다. 특히 생각 없이 ‘女’를 집어넣은 제목들은 더 이상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 많은 지탄을 받아왔다.

서울신문 인터넷판 관련 기사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518500181

강남역에 추모 인파가 몰리는 것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반발이며 약자들이 살아남기 위한 연대의 요청이다. 앞으로의 언론은 선정주의에 기대거나 현상에 그저 놀라는 것 이상의 작업을 사명감을 갖고 자청해야 한다. 사람들이 보여준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아서 이 혐오의 시대를 공동체가 어떻게 견뎌나갈 수 있을 것인지를 연구하고 제시해야 한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혐오’에 의한 비극은 대개 강자에게 당한 피해를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학대하는 것으로 보상하려 한 시도의 결과이다. 즉, 혐오는 권력관계가 작용한 산물이다. 이 비겁한 혐오의 화살은 상대적 강자로부터 대개 소수의 성, 인종, 민족, 국적, 종교, 아동 심지어는 작은 동물을 향한다.

이런 지옥과 같은 상황의 근본적 교정은 각 주체들이 스스로를 약자로 여긴다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 ‘강자’에 속하게 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기득권에 맞서기 위한 상호간의 호혜적 제스쳐를 취할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여성혐오’에 포인트를 맞추어 말하자면 당사자도 아닌 남성들이 억울하다는 둥 일반화하지 말라는 둥 ‘피해자’를 자처하며 남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강자의 입장에서 여성들의 공포를 이해하고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함께 하는 게 시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체들에게 단지 윤리적 결단을 묻는 것은 대개의 경우 결국 공허한 결말을 불러온다. 때문에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서는 ‘정치’의 작동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정치의 작동이란 여의도에 있는 어느 특정 세력의 크기가 커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혐오가 만연한 상황을 어떻게든 바꿔보려는 노력이 공적 의의를 갖고 실제로 체제의 변화로 수렴될 수 있도록 구조가 작동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정치에 요구하는 것은 여전히 언론의 중요한 임무이다.

여기까지 썼으니, ‘그러는 당신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느냐’는 항변이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남성이 살기 편한 사회에서 약자들에게 많은 잘못을 해온 게 사실이다. 그렇게 ‘자격’의 문제를 묻는 다면 할 말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떳떳할 게 없는 존재라도 지금 필요한 말을 공적 방식으로 하는 것은 우리가 이 난국을 헤쳐 나가는데 결국은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다. 여성들이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과 함께 더 많은 '다수자'로서의 남성들이 각자의 양심을 말하는 세태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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