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 한 권을 읽어 내려가는 것만큼이나 짜릿한 경험은 책의 어느 대목에서 저자가 주목한 또 다른 양서(良書)의 존재를 발견하는 일이다. <새로운 충견들>의 저자 세르주 알리미는 프랑스 기업과 미디어의 점증하는 뒤얽힘을 설명하면서 노엄 촘스키의 <환상을 만드는 언론>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인용하고 있다: 어느 날 한 미국 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다. “정확하게 엘리트가 어떻게 미디어를 통제할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대답은 이렇다. “어떻게 엘리트가 제너럴 모터스를 통제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은 제기되지 않는다. 엘리트는 제너럴 모터스를 통제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엘리트에 속하는 일이다.” (제너럴 모터스는 미국의 4대 네트워크의 하나인 NBC 방송국을 소유하고 있다.) 쉽게 말해 엘리트가 미국 언론을 지배하고, 언론은 그런 지배 엘리트를 대변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미디어의 소유 집중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언론 보도가 기업의 이익에 종속된 시대적 현실을 예리하게 추적하는 촘스키의 논증은 다음과 같은 지극히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어떤 민주적 질서를 추구하는가?” ‘특수 이해관계’(special interests)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노동자, 농민, 여자, 젊은이, 노인, 장애인, 소수인종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 상대 개념으로 ‘국익’(national interests)이라는 것도 있다. 특수 이해관계인을 제외한 기업체와 금융기관, 다른 사업 엘리트 등등을 일컫는다. 국익 편에 선 특권 엘리트 집단은 민주주의가 특수 이해관계인들의 조직적인 노력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간주한다. 시민은 소비자요 참관인일 뿐 참여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정책을 추인할 권리만 있지, 정책 수립에 참여할 권리는 없다. 국가가 설정한 이런 좁은 의미의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대중의 행동은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순종하지 않는 민중은 적의 영토처럼 정복하여 복속시켜야 할 대상인 것이다.”

촘스키는 ‘절대적 복종’을 강조하는 교회라는 경배공동체(community of worship)에 빗대어, 오늘날에는 국가라는 종교가 “공공 보조금을 담당하는 사람들과 자유기업이라고 불리는 민간 이윤 시스템의 주인들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독트린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디어는 결국 주류사회와 특권 엘리트의 이익을 지원하기 위한 보도를 생산하고, 대중적 토론 역시 이런 목적에 부합하는 틀을 넘어서지 않도록 제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국가-기업 연합체(state-corporate nexus)에 동조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카르텔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동의를 제조(manufacturing consent)하고, 필요한 환상(necessary illusion)을 만들어낸다. 권력에 맞서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드는 어려운 일이다. 높은 수준의 증거와 주장이 요구된다. 지배 엘리트들에게도 절대 환영받지 못한다. 하지만 ‘애국적인 아젠다’(patriotic agenda)에 동조하는 것은 그런 어려움을 수반하지 않는다. 공인된(official) 적들에 대한 공격은 입증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만약 사실이 아닐 경우에도 정정 보도를 할 필요가 없다. 많은 언론인들은 주류에 동조하는 것이 쉬운 길임을 잘 알고 있다. 특권과 위엄이 보장된 세계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그들은 자신이 ‘저널리스트’라는 자각쯤 애써 잊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 편리한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것이 곧 진실이다. 궤변가들이 나타나 이른바 ‘역사적 엔지니어링’(historical engineering)이라는 ‘공작’을 도모한다. 사실 메커니즘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용산 참사를 예로 들어보자. 참사의 궁극적인 원인이 된 무리한 진압 작전이 문제가 되자, 공권력은 진압 경찰에게 가해지는 불법 폭력 장면만을 간추린 동영상을 일선 지자체에 배포하고 심지어 방방곡곡 아파트에 홍보물을 만들어 뿌리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검찰로 대표되는 사정기관은 한 손에 심판의 잣대를 쥐고 언제든지 ‘면죄부’라는 카드를 쓸 준비가 돼 있었다. ‘동의를 제조’하는 작업이 한창일 무렵, 때마침 연쇄살인 사건이라는 호재까지 더해지자 이번엔 권력의 최상층부가 나서서 용산 참사를 덮을 홍보 전략을 적극 시행하라는 지침을 내린다. 진실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 더는 무시할 수 없게 될 때까지 거짓말은 계속됐다. 처음엔 그런 일이 없다고 발뺌했다가, 이내 실체가 드러나자 이번엔 일개 부하직원의 개인적인 행동이라는 해명을 내놓는다. 그리고 사표가 신속하게 수리된다. 진실이 밝혀진 뒤 피해 통제(damage control) 단계로 들어가면 권력이 흔하게 취하는 태도다. 우리는 이렇게 도처에서 국가-미디어의 프로파간다 시스템이 작동하는 생생한 사례를 목도하고 있다.

▲ 노엄 촘스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미국이 만든 ‘세계의 큰 그림’ 아래서 재앙에 가까운 고통을 받아온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중동의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미국 주류 언론의 이중적인 보도 행태를 분석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촘스키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니카라과 야당 신문의 수난사를 수백 차례나 보도하는 동안에 엘살바도르의 독립적인 두 신문이 당한 그보다 몇 갑절 더한 탄압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었는지, 팔레스타인의 테러 행위에는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한 신문들이 이스라엘의 더 잔혹한 폭력에는 어째서 모르쇠로 일관했는지, 구 소련이 세운 아프가니스탄 정권이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해 지뢰 매설 지도를 공개할 때조차 미국 정부가 자신들을 대신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지뢰 제거에 나선 민간팀에 지뢰 지도를 넘겨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국가-미디어의 프로파간다 시스템으로 명쾌하게 설명한다. 물론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언론이 언제나 정부에 완전히 협조적이고 순응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촘스키가 지적한대로 그런 비판 역시 본질적으로 국가와 기업, 미디어 권력이 공유하는 이익의 틀 안에서만 이뤄진다.

미국 언론을 모델로 삼고 있는 우리에게도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겁게 다가온다. 책의 한 대목에서 촘스키는 개신교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옮겨 놓았다. “국가의 가장 두드러진 도덕적 특성은 아마 위선일 것이다.” 여기에 장단을 맞추는 언론 역시 비슷한 도덕적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래서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어떤 민주적 질서를 추구하는가?” 분명한 것은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조작과 통제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촘스키가 책의 말미에 힘주어 말한 것처럼 “우리가 행동하는 쪽을 선택하기만 한다면, 더욱 인간적이고 품위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을 도울 기회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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