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공단·공사·출연기관에 노동이사제(근로자이사제) 도입을 추진한다고 10일 밝혔다. 노동자를 이사회에 참여시키고 의결권도 주겠다는 게 서울시 방침이다. 노동이사제 적용 대상은 서울시 산하 30인 이상 기관으로 서울메트로, 도시철도공사, 시설관리공단, 서울의료원, SH공사, 세종문화회관, 농수산식품공사, 신용보증재단, 서울산업진흥원, 서울디자인재단, 서울문화재단, 시립교향악단, 서울연구원, 복지재단, 여성가족재단 등 15개 기관이다. 서울시는 직원이 30인 이상 300인 미만 기관에는 1명의 노동자이사를, 300명 이상 기관에는 2명을 두기로 했다. 노동자이사는 공개모집과 임원추천위원회 추천을 거쳐 서울시장이 임명한다. 임기는 3년이고 비상임에 무보수다. 만약 조합원이 이사로 임명될 경우에는 노조를 탈퇴해야 한다.

노동이사제는 유럽에서 이미 보편화된 제도이고, 이 제도를 활용하면 노사갈등을 줄이고 선순환 경영구조를 확립할 수 있다는 게 서울시 설명이다. 서울시는 “우리나라의 사회 갈등수준이 OECD 27개국 중 2위, 특히 노사갈등이 2번째로 심각한 갈등으로 조사됐으며,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매년 최대 246조원에 달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하면서 “근로자이사제 도입이 하나의 갈등 해소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서울시는 “독일, 스웨덴, 프랑스 등 OECD에 가입된 유럽 18개국에서는 이미 보편적으로 도입 중”이라며 “근로자이사제는 OECD의 ‘공기업 지배구조 가이드라인’에 명시돼 있고, 유럽의회와 세계경제포럼 등에서도 그 효과를 인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시의 목표는 5월 내 조례안 입법예고, 8월 내 시의회에 조례안 제출, 10월께 제도 시행이다. 박원순 시장은 2014년 11월 ‘서울시 투자·출연기관 혁신방안’을 발표했고, 이후 서울시는 한국노동연구원을 통해 ‘서울시 투자출연기관 참여형 노사관계 모델 도입방안 연구’를 진행하고,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왔다.

▲경향신문 기사
▲한겨레 기사

서울시의 노동이사제 도입은 사용자가 노동자를 경영의 주체로 인정하고,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제도화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명순필 서울도시철도공사 노조위원장은 “이사회에 노동자가 참여하면 신뢰와 정보 공유라는 부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철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실장은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이해관계자가 이사회에 참여함으로써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고, 견제와 통제의 장치를 마련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반면 노동계 내부에는 “1~2명의 노동자가 이사회에 참여해서는 별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민주노총 남정수 교육선전실장은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독일 노사공동결정제도처럼 노동자 대표가 과반을 차지해야 노동자가 책임성 있게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재계의 시선은 정반대다. 노동이사제가 한국의 시장경제질서에 맞지 않고, 공기업 개혁을 방해해 생존마저 위협한다는 주장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10일 ‘서울시의 노동이사제 도입 계획에 대한 경영계 입장’을 발표하며 서울시가 위험하고 무모한 실험을 하고 있다며 노동이사제 도입 계획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경총의 주장은 요컨대 △독일에서 노동이사제가 가능한 이유는 독일의 경제체제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바탕에 뒀기 때문인데 이를 ‘주주 자본주의’가 기본인 한국에 도입하는 것은 맞지 않고 △“아직 노사간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양보와 희생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협력적 노사관계가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한국에서 노동이사제는 노동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그 역할이 편중될 것이라는 것이다.

보수언론도 재계의 주장을 대변하며 서울시와 박원순 시장을 두들겼다. 조선일보는 11일자 사설 <서울시 ‘근로자 이사’, 이상은 좋지만 그럴 여건 돼 있나>에서 “노조와 근로자를 경영의 감시자이자 협력자로 참여시킴으로써 공기업 경영에 건설적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바람직한 일”이라면서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노사 문화가 이 제도의 좋은 취지를 살려나갈 정도로 성숙해 있는지 의문이라는 점이다”라고 썼다. 조선일보는 서울메트로와 서울도시철도공사의 통합이 노조 반대로 무산된 사실을 거론하며 “비용을 줄이고 경영 효율을 높이자는 철도공사의 합병이 노조의 이해관계 탓에 어그러진 것”이라며 “서울시가 근로자들에게 의사 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주고 싶다면 협력 대신 투쟁을 앞세우고 정치적 이유로 경영의 발목을 잡는 귀족 노조들 행태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이 제도가 대기업까지 확대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조선일보 사설
▲중앙일보 기사

동아·중앙일보 또한 재계의 입장을 대변했다. 동아일보는 2면에 <서울시 公기관 ‘근로자 이사’ 도입… 재계 반발>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노동이사제 내용과 경총의 반발을 절반씩 다뤘다. 동아일보는 송원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이 “기업에 이미 감사나 사외이사 등 견제 기구가 있는 상황에서 근로자 대표까지 경영에 간섭하면 정상적인 기업 활동이 어려워진다”고 강조했다고도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16면 사회면에 이 소식을 다뤘는데 기사의 대부분은 노동이사제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기사 끝에 “노동이사제는 우리나라 경제체계나 현실을 도외시한 제도로 심각한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특히 공기업의 개혁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경총 관계자의 평가를 한 문장 붙이고 기사 제목을 <박원순, 공기업 15곳 ‘노동이사제’ 도입 논란>으로 뽑아냈다.

서울시는 공적 지배구조인 공기업에 노동이사제를 도입한다는 것이고, 사기업은 노사가 자율적으로 협의를 하면 될 문제다. 그런데 재계와 보수언론은 왜 이런 반응을 보일까. ‘조중동은 사주일가의 오너십이 강한 족벌언론이고 원래 노동조합을 적대시하지 않느냐’ 정도로 분석하기에는 보수언론이 이번 문제에 내비친 입장은 편집증(paranoia)에 가깝다. 특히 조선일보 사설의 수위는 세다. 특히 조선일보는 이날 8면에 박원순 시장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는데, 박 시장을 대권주자로 대접했다. 조선일보는 박 시장에게 근로자 이사제에 대한 재계의 반발, 대기업 노조에 대한 입장, 창조경제에 대한 비판, 4·13 총선 평가, 대선 출마 의지, 광화문 광장 세월호 천막 문제 등을 물었다. 그리고 사설에서는 서울시의 노동이사제를 비판했다. 인터뷰의 내용과 지면 배치를 고려하면 조선일보의 사설은 ‘대권주자 박원순’을 향한 일종의 경고 성격이 짙다고 볼 수 있다.

재계와 보수언론의 편집증적 반응에서 포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들이 우리 사회가 다양한 영역에서 공적 개입을 강화하는 것을 차단하고 싶어하는 심리다. 재계와 보수언론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보수신문들은 2014년 국회가 종합편성채널을 포함한 방송사업자에 ‘노사동수 편성위원회 설치 의무화’를 추진하자 강하게 반대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국회의 요구는 종편이 자율적으로 노사 동수의 편성위원회를 구성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민간방송까지 모두 ‘勞營 방송’ 만들겠다는 건가>라는 제목의 사설로 맞받아쳤다. 노동에 대한 적대와 함께 자신이 구축한 성역을 지키려는 게 재계와 보수언론의 일관된 욕망이다. 역으로 보면, 지금이야말로 서울시와 박원순 시장이 이들과 부딪힐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보수언론과 재계는 지금 사적 영역에 미치는 공적 개입에 대해 철저히 선을 긋고 있다. 박원순 시장이 진짜 대권주자라면 노동과 공공성을 잣대로 이 선을 다시 그어야 한다.

▲조선일보의 박원순 서울시장 인터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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